-/후회의 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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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11.12 후회의 습작?
  2. 2020.10.24 정확한 욕망의 실험 (미완성)
  3. 2020.05.13 200513
  4. 2018.06.10 draft 4
  5. 2018.05.21 연습하는 일기 : 나 1
  6. 2018.05.17 PW : thinkofmeee 1
  7. 2018.05.01 후회의 습작, 다시. 1
  8. 2017.04.06 -
  9. 2016.12.11 - 3
  10. 2016.03.12 -

후회의 습작에는 후회하지 않을 일들만 적는다, 후회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고 적었던 바 있다. 최근, 바로 어제까지의 일기 역시도 그렇게 시작했다.

 

-- 정말 후회하지 않는가?

 

이제와서야 덜컥, 그 모든 것들을 되돌릴 수 있다면 나는 ________ 하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빈 칸에는 어떤 말을 넣어야 할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후회하나?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부서뜨리지 않았었다면 좋았을걸. 그때 그러지 말걸, 하는 기분이 드는가? 맞아. 하지만 그 때, 그 순간의 나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었나? 지난 어떤 일기에 나는 그것을 "내가 나 자신일 수 있었던 순간"이라고 적었다. 맞아, 어쩌면 오빠와의 관계 중에 나는 그것이 절실했다. 하지만 지금은? S와의 관계에서도? 지난 몇 주 간의 내게 왔던 순간들이 그런 것이었을까? "하고싶은 것을 망설이지 말아요" 라는 속삭임은 너무나도 달았다. 얼마 전 R 선배는 내가 자꾸만 '무언가를 깨뜨리고 싶어하는' 충동을 느끼는 것이 양육환경으로부터 왔었으리라 짐작된다고 말했다. 지난 인생을, 그러니까 내가 지금의 자아정체성을 확립하게 된 열 다섯 살 이후로의 열 다섯 해를 되돌아봤을 때 나는 늘 내가 하고싶은 것을 끝까지 밀어붙여본 적 없는 상태에 잠식당해 있었다. 내가 품은 욕망들은 대개 보편적이지 않은 것이었고, 내가 감히 그런 것들을 욕망할 자격이 있는지 늘 허락을 구하려고 했으며, 그 욕망을 표현했을 때 거절당할까 두려웠다. 나는 늘 내 욕망을 **선언**하고 **쟁취**하기 위해 치열하게 애써야만 했으며, 내 연애들은 내 욕망 - '정체성' - 과 길항해왔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러던 와중 어떤 사람들이 - 내 욕망을 애써 증명하지 않아도 이해하는 모습을 보이고, 나를 욕망하는 방식으로 내게도 그를 욕망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말해주는 듯한 사람들이 나타나는 순간 나는 늘 무너지는 마음으로 튕겨나갔다. 왜냐면 그건 너무- 너무- 자유로웠으니까. 애인은 내가 Y와 있을 때 그가 주는 "짜릿함"에 몸을 맡겼을거라고 생각하겠지만, 기실 내가 느꼈던 것은 육체적인 짜릿함은 아니었다. 나 자신을 치열하게 증명하지 않아도 나를 긍정해주는 누군가를 만나는 경험은, 내게는 너무나도 드문 것이었단 말이야. 폴리아모리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한 이후, 독점적 연애 중 내가 저울에 올렸던 것은 내 애인과 다른 사람이 아니었다. 내 애인과 나 자신, 애인을 사랑하기 위해 나를 죽이고 싶던 마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NX는 이번 이야기를 전해듣고 "단원은 지난 시간에서 배운 것이 없나"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실상 NX야말로, 당사자인 S를 제외하면 가장 내게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오빠는 나를 용서했지만(그래서 나도 나를 용서할 수 있었지만) NX의 일부는 아직 나를 용서하지 못했거든.

 

나야말로 그것이 무섭다. 나는 정말 배우는 것이 없는 사람인가?

 

어떤 순서쌍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감히 두 사람의 이름을 내 연애의 역사에 넣어도 된다면:

 

( ㄱㅅㅇ : ㄷ ) - ( 오빠 : B ) - ( S : Y )

 

대개 전자는 헤테로섹슈얼-모노아모리였으며, 연애에 충실했고, 내게 주는 것이 많았으며, 그렇게 내게 안정감을 주었지만 반대로 원하는 것도 많았다. 그들과 함께 있을 때 나는 늘 미지근한 물에 턱끝까지 잠겨있는 압박감을 느꼈다. 한편 후자는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움같은 것을 보여주었지만, 그만큼 쉽게 나를 비난했고 나를 불안정하게 만들었으며 무례하게 떠났다. (그리고 모두 예술-남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낄낄 웃었다) 전자에서 후자로의 관계로 이행할 때, 나는 늘 - 자각하지 못했다고, 혹은 아무리 절실했다고 하더라도 - 관계에서의 신뢰를 깨뜨렸다. 모노아모리 식으로 납작하게 말하면 바람을 피웠다든가, 환승이별이라고 비난받을만한 일들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정말 배우는 것이 없나?

 

조금은 나아졌다. 월요일 밤, 나를 멈췄던 것은 무엇일까. S의 마음이었을까? 혹은 "약속을 어겼다"는 당위에 대한 죄책감이었을까?

 

L의 이슈가 있었을 때 NX는 내가 평생 타인의 욕망의 대상이 되기를 욕망하며 허덕일거라고 했다. 매 순간 나를 움직였던 짜릿함은 거기에서 왔다. 이번에 조금 더 잘 멈출 수 있었던 것은, 타인의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고, 지금 이 순간이 아니더라도 언젠간 또다시 그럴 수 있을 거라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S의 마음에서 눈을 돌리고 내가 찾았던 것은 Y가 아니라 나 자신의 인정욕구였다. 그리고 그간 (많은 부분 S 덕분에) 내 마음이 조금은 더 건강해졌으므로 조금 덜 가서 멈출 수 있게 됐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끈질긴 인정투쟁을 내려놓지 못하는 한, 나는 영영 이런 순간들에 튕겨나가버리고 말까?

 

이쯤 이야기를 듣고 NX는 내가 "뭔가를 배웠다"고 했다.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후회하지 않는가? 모르겠다. '그 때로 다시 간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고 말할 수 있을까? 확신이 없다. 다만, 나는, 다른 방식으로 나를 증명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절실하게 바란다. 신뢰를 깨뜨리는 방식으로 나를 내던지지 않더라도 나를 증명하고, 내 허덕이는 인정욕구를 채울 수 있는 사람이 되는 방법을 찾을 수 있기를 끔찍하리만치 진심으로 바란다.

 

 

그래서 이제는 후회의 습작이라는 이름 아래 일기를 쓸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일기장의 이름을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신뢰의 습작>, 내가 다른 사람과의 신뢰를 깨뜨리지 않고도 나를 잘 쌓아가기를 바라며, 내가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할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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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인과 다수 연애를 하기로 합의했다. 우리는 독점적-배타적 연애관에서 살짝 비껴나가 있었으므로 이미 다자연애의 스펙트럼에 놓여있었고, 그래서 애인은 이를 다자연애를 합의한 것이 아니라 다수연애를 합의했다고 명명했다.

- 나는 무엇을 하고싶을까?

- 이제까지 나는 가능한 한 멀리까지 뻗어나가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어차피 내 한 쪽은 애인에게 붙들려 있었으므로, 한쪽엔 애인의 손을 꽉 잡고 있는 상태에서 반대쪽으로 손끝을 쭉 뻗어내어 가능한 한 멀리 닿고 싶었다. 나는 종종 "저울에 올린다"는 표현을 썼는데, 내 저울은 그 무게가 어떻든 이미 애인의 마음쪽으로 기울어진 상태로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투정부리는 마음으로 반대쪽에 이것저것을 올려놓았다. 내 괴로움, 무엇을 하고싶은 마음, 이런저런 것들을 잔뜩. 그런데 막상 그 고정쇠를 풀어버리고 "정말로" 저울 양쪽의 무게를 재야 하는 상황이 되자 덜컥 무서워졌다. 내가 너무 많이 올려놓은 나머지 반대쪽에 놓인 애인의 마음과 괴로움이 튕겨나가 버리는 것은 아닐까? 무엇을 올리거나 덜어내며 우리 관계의 균형을 맞춰야 하는데, 너무 많은 것들을 와르르 올려버릴 수는 없는데. 지금 내 손에 쥔 것이 정말 무게를 달아야 할 것인가?

- 그러니 나는 이제야, 애인을 잃어버릴 것이 무서워진 것이다.

-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을까?

- 무엇을 더 하고싶어진다기보다는, 하지 못하는 것이 없어져서 좋았다. 종종 너무너무 좋아서, 눈 앞의 사람에게 닿고 싶은 마음이 벅차오를 때는 상대방도 그것을 원할까? 다음에 애인이 싫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런 마음을 억누르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닿고 싶을 때는 닿을 수 있다! 이제 누군가를 만지고 싶으면 만져도 되고 때로 입 맞추고 싶을 때는 입 맞출 수 있다. "상대방과 무엇을 하고 싶을 때는, 오직 우리 두 사람 사이의 합의만이 중요하다"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사회적인 통념이나 관습적인 관계 양상을 고려하지 않고. 선을 흐리는 것, 경계를 밟는 것, 그래서 "자유로워"지는 것 - 혹은 그렇다고 착각하는 - 것.

- 그래서 그렇게 자유로워 졌을 때, 나는 무엇을 하고싶을까?

- 자유롭다는 것, 다시 말해 백지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실상 괴로운 일이다. 무엇이건 다시 검토해야 하고, 솔직하게 인정할 용기가 필요하다. 이제까지는 "남자친구가 있다"는 것이 좋은 핑계가 됐다. 너랑 연애하고 싶다고 말하지 않아도 됐거든. "애인과 합의가 되지 않았다"도 돌려 말하기 좋은 멘트였다. 너랑 섹스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아도 됐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명확하게 말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 그러나 타인의 욕망에 응하거나 거절하기 이전에, 나는 내 욕망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나는 무엇을 욕망하는가?

- 애인은 "내 애인은 왜 다른 사람과 섹스를 하고싶을까?" 하고 말했다. 또 "나도 새로운 사람과의 섹스가 주는 짜릿함을 알아요(그래서 단원이 왜 그걸 하고싶어하는지 이해해요)" 라고 말했다. 그런데 나는 정말 섹스가 하고싶을까?

- 나는 왜 더 많은 사람들과 섹스가 하고싶을까?

- 한때는 누군가의 성적 욕망의 대상이 되는 방식으로 내 자존감을 채우고 싶어서 허덕이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야. 때때로 여전히 낯선 사람과의 대화가 주는 간질거리는 즐거움이 좋아서 틴더를 다시 깔아볼까 하는 기분이 들긴 하지만, 나는 이전만큼 허덕이지 않는다.
- 한편 섹스(연애)는


- 끝맺지 못한 글이지만 공개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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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3

-/후회의 습작 2020. 5. 13. 17:39

단수연애를 하기로 합의했다.

어제 애인은 '범위를 넓혀보자'고 했다. 조금의 진척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애인과 연애에 대해 이야기하면 이야기할 수록 기본적으로 연애를 이해하는 우리의 문법이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고, 애인에게 가해지는 다자연애라는 부담이 더더욱 내 언어를 오독하게 만든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것에 지쳤다. 애인은 모노아모리 치곤 훌륭하게 폴리아모리의 매커니즘을 이해"해주"었지만, 우리의 언어 사이에 놓인 크레바스를 의식하며 조심조심 다리를 놓는 것에. 우리의 논의가 동등한 축에 놓여있지 않고, "기본값"인 모노아모리에서 "변수"인 폴리아모리를 논의하며 애인의 허락을 구하는 것에. 애인은 피해자인 마냥 나를 성토하고 나는 가해자인 양 쩔쩔매며 양해를 구하는 것에.

내게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은 팬섹슈얼에서 시작해 자신의 성적 취향을 선택하고, 모든 연애는 폴리아모리에서 시작해 (원한다면) 독점적 연애를 합의해가는 과정이어야 마땅하다. "결혼을 하고 싶은 사람이 설득해야한다"는 검블유의 말을 빌려, 모노아모리로/단수연애로 우리 관계를 제한하고 싶은 사람이 설득했어야 하지 않은가? 하지만 애인에게는 "모노아모리가 통상적, 나는 다른 사람은 하지 않는 고민을 해야 한다"는 훌륭한 무기가 있었다. 애인과 나는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를 설득해야 하며, 나의 고통은 애인의 고통과 같은 무게값을 지녀야 했지만 우리의 논의는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궁지에 몰린듯한 기분으로 선택했다.

결국 이런 선택을 하게 했다는 점으로 애인을 원망하지는 않는다. 내가 어쩔 수 없듯 애인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으니까. 다만 같은 결론이더라도, 좀더 침착하게 충분히 논의하고 서로를 포용하는 과정 끝에 낼 수는 없었는가. 그렇지 못하도록 나를 몰아붙이고 기어이 소진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애인이 밉다. 왜냐면

우리는 언젠가 헤어지고 말 테니까.

 

오빠와 헤어지고 난 이후, 나는 다자연애자가 아닌 사람과는 연애하지 않겠다는 굳은 원칙을 세웠다. 애인과의 관계도 그런 줄로 알았다. 애인은 사기결혼 당한 기분이겠다, 며 농담을 했다. 서로간에 다소의 미스커뮤니케이션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 연애를 '시작해서는 안 됐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둘 다 어떤 일일 줄 몰랐던 게지. 다자연애라는게 애인에게 이토록이나 큰 마음의 장애물이 될 줄, 그것을 건너가는 과정이 이토록이나 어려울 줄을.

그래도 우리는 논의를 꽤 잘해왔고, 우리 사이의 간격을 조금은 좁혔다. 다만 더 이상 좁혀질 수 없는 조밀한 평행선을 찾아가는 과정이 내게는 너무 지난했고, 연애에서의 대화와 합의를 끌어내는 것이 특기라고 말하면서도 그것에 지쳐서 그만 내가 포기해버리고 만 것이다.

조금 더 논의해 볼 수는 없었나? 최소한 (내가 아는 어떤 커플들처럼) 실험해 볼 수는 없었나? 정말 이 간격이 -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나?


"원칙대로라면" 나는 다자연애에 대한 논의를 이어나갈 수 없게 된 순간 애인과 헤어져야 마땅하다. 당위적 사고로 움직이는 나의 매커니즘은 그러하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게 그렇게 쉽겠어. 다정은 병이고 나는 모질지 못하게 사랑에 사람에 지고 만다.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우리는 더 이상 다자연애를 논의하지 않을 것이고, 애인은 실체 없는 불안을 가지지 않을 것이며, 나는 더 이상 애인과 농담으로라도 결혼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발에 새긴 타투를 볼 때마다 내 "원칙"을 떠올릴 것이고, 내가 스스로의 원칙을 지키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에 - 또는 내가 불편하지는 않고 몸에 그럭저럭 맞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내 것이 아닌 옷을 입고 있다는 생각에 - 가끔 괴로울 것이며,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할 때 우리는 헤어질 것이다.

다음 연애는 반드시 다자연애자와 할 거야. 혹은 연애를 하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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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의 습작 2018. 6. 10. 16:18

한 달 간의 엠바고를 무엇때문에 걸었더라? 기억나지도 않는 이유가 몹시 무의미해보이니까 그만둔다. 지난 한 달간 나는 무엇을 배웠더라? 나와 대화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에게 말을 걸지 않기 위해 - 여전히 좋아한다는 말은 오히려 마음의 짐이 될테고, 보고싶다는 말은 진절머리날테고, 기다리고 있다는 말은 부채감이 될 테니까 - 무진장 애를 썼다. 거의 성공할 뻔 했다. 한 달은 너무 길었고 막바지쯤 나는 몇 번씩 무너졌고 말을 질질 흘렸고 그래도, 그래도 이쯤이면 점잖지 않은가. 

두 종류의 일기가 있다. 수신인이 읽어주기를 바라는 글과, 읽기를 바라지 않는 글. 수신인이 읽어주기를 바라는 일기들이 있었다. 읽어주기를 바랐으므로 당장 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들이 이제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 되었으므로, 사실 나는 내가 뭘 썼는지도 모르겠고 왜 그런 글들을 썼는지도 모르겠으므로 이제야 엠바고를 풀어둔다. 그러므로 지난 일기들은 어떠한 청구서도 아니고, 앞으로 쓸 일기들에 혹시나 지난 연애나 무엇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대도, 나는 아무것도 받아내고 싶지 않다는 것을 밝혀둔다. 나와 이년 반을 만났던 애인은 단 한 번도 내게 똑바로 어떤 이유때문에 헤어지자고 말한 적 없다. 5월 1일, B는 오빠와의 일을 놓고 내 입에서 "지응이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계속 만나기 어렵다"는 말을 끌어낸 후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얼버무렸고 그로부터 3일 후엔 '사실 너와의 연애가 내게 아무것도 남긴 것이 없다'고 말했다. 생각이 정리되면 연락할테니, 연락도 하지 말고 찾아오지도 말라고. 그리고는 한 달이 지나서 한다는 이야기가, 기껏, "부채감을 씌워서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에게서 "도망쳐 나온" 결정이 옳다고. 나는 아직도 이 연애가 왜 끝났는지 모르겠다. 불안형의 연애스타일과 회피형의 연애 스타일이 달랐다는 것은 만난 지 일 년이 안 돼서 드러났고, 이미 나는 3월 중순 그 문제로 그만 만나자고 했는데. 그것이 그렇게 괴로웠다면 그냥 그때 끝냈으면 되었을 것을. 헤어지자고 하기 3일 전 지응은 내가 연애에서 바라는 것이 너무 많으니 그 선을 넘어오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했고 나는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이 모든 문제 해결의 과정들은 죄다 무의미한 일이었단 말이야? 그렇다면 오빠의 문제는 핑계였을까? 마지막으로 남길 이야기가 "부채감"이라는 것도 우습지. 한 쪽이 부채감에 연애를 지속했다면 반대쪽에서는 그걸 몰랐을까? 그렇게 말한다면 나는 끝내 하지 않으려고 했던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 어느 순간부터 지응으로부터 받는 것들이 "어버이날 카네이션"처럼 느껴졌다고. 

하지만 이런 식으로 안좋은 것들을 끝없이 말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단말인가? 어느 연애건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이 뒤섞여 있는데.


정말이지 헤어진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연애는 언젠가 쫑나. 지금이 내가 납득할 수 없는 것은 그 과정이다. 하지만 이쯤 되면 그냥 납득해 버린 것도 같고 또 납득하지 않을 방법이 없고


그래서 나는 좋은 것들만 생각하는 일기를 쓰려고 한 달간 열심히 생각했다. 둘 중 아무도 이상한 사람이 되지 않고, 아무도 서로를 탓하지 않을 수 있는 설명을 찾아냈고 이년 반의 연애가 내게 무엇을 남겼는지를 생각했다. 그러다가 거기에 대해서 이렇게 쓰는 것이 또다시 무의미하게 느껴졌으므로, 몇 번을 썼다가도 그냥 지워 버렸다. 어차피 읽어야 할 사람이 읽지 않을 일기에 그런 말들을 써봤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야? 그리고 나는 이제 그것이 읽혀지기를 바라는 일기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데. 

좋은 연애였는가 아닌가를 판단할 수 있는 지표로 나는 자존감을 든다. 연애가 끝난 후 어땠는가. 나는 B가 마음의 문제에 신경을 많이 썼던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아마 내가 지금 이쯤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그간 조금이나마 더 건강한 마음상태를 회복했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나는 이것이 B의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진심으로 그렇다. 


고작 연애하다 끝났다고 이렇게 없는 사람처럼, 모르는 사람처럼 굴어야 하는 것이야말로 웃긴 촌극이라고 생각했다. 한때 어느 누구보다도 삶의 많은 부분을 공유했던 사이인데, 앞으로 예전같지는 않더라도 서로 안부정도는 물어볼 수 있지 않아? 왜 이렇게 우습게 굴어야 하는지 모를 일이다. 아니면 내가 누군가의 삶에서 완전히 삭제되어야 할 만큼 끔찍한 잘못을 저질렀던걸까?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원래 연애란게 다 이렇게나 고약한거라면 나는 앞으로는 별로 연애하고 싶은 기분이 안 되기는 하는데, 어쨌거나 다음 번에 연애라는 걸 하게 된다면 "잘 헤어질 수 있는 사람"과 하고 싶다고. 어떤 두 세계가 만나서 서로에게 스며들어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그것이 대단한 일인 만큼이나,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아지는 과정 역시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럴 용기가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에이넉스와 싸웠을 때 에이넉스가 썼던 일기를 생각하고 있다. 여전히 화가 나고, 여전히 누가 얼마만큼 잘못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보고싶고 같이 공부하고 싶었고 그래서 그냥 보자고 했다고. 어쩌면 그것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문제는 사람의 얼굴을 마주볼 때에야 해결할 수 있다. 다시 연애하자는 이야기 아니고, 약속한 대로 가족으로 남자는 이야기도 아니다. 나는 내가 사랑했고 내가 만나왔던 사람과 이 관계를 끝내고 싶다. 이렇게 내 머릿속에 하나 만들어놓은 누군가와 섀도우복싱 하면서 울 일이 아니라. 그것이 가장 비참하고 끔찍한 한 달이었다. 내가 누구와 헤어져야 하는지도 모른 채 혼자서 헤어져야 했던 것. 나한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으므로 나는 지응의 SNS에서 지응이 지금 어떤 기분인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를 나와의 관계를 무엇이라고 정리하고 있는지 힌트를 얻기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트위터에 마음 누르는 거 하나가 다 내 얘기 같아서 혼자서 트위터 한 줄에 한 번씩 다시 차였다. 그리고 그런 내가 조금 미쳐가고 있는 것 같아서 모든 SNS에 뮤트를 걸었다. 

원래는 B의 트위터를 블언블 할 계획이었다. 당장 그러지 않았던 것은, 그게 '너랑 영영 안 보겠다'는 신호로 잘못 받아들여질까봐, 어떤 마음으로 그랬는지를 일기에 쓰고 엠바고를 푼 다음이어야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무 말 없이 끊어내는 것이 제일 나빠. 왜 블언블하고 싶었냐면, 나는 참고있지만 여전히 징징대고 싶고, 징징댈 수 있는건 트위터밖에 없고, 내가 징징대는 걸 보면 B는 틀림없이 또다시 (내가 의도하지 않은) 부채감을 느낄 테니까. 다른 말로 하면, 이제는 '좋은 것은 보여주고 싶지만 나쁜 것은 보여주고 싶지 않은' 사이가 된 것이다. 그동안 내가 하고싶던 이야기는 정말로 사소한 것들이었다. 나는 밥을 잘 먹고 있고, 여전히 과제가 많고, 마감을 밀리고 있지만 어렵지 않고, 그러니까 잘 지내고 있다고 몹시 신난다고. 그래서 평소에 쓰지 않던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그렇게나 많이 썼다. 왜냐면 그건 누가 읽었는지 확인이 되니까. 이 메세지가 수신인에게 제대로 전달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니까. 반대로 내가 묻고싶었던 것도 사실은 그저그런 것들이었다. 산방 프로젝트는 제대로 되고 있는지, 셰어하우스 촬영은 요즘도 잘 가고 있는지, 그래서 여행 다녀왔으니 편도는 괜찮은지, 밥은 건강하게 잘 챙겨 먹고 있는지, 그런 것들. 이 시시한 것들을  들을 수 없는 것이 가장 힘들다.  



라라랜드가 싫다. 양쪽 모두에게 황폐하게 남은 연애와, 한쪽에게는 황폐했지만 다른 쪽에게는 그래 사랑했다 즐거웠다 행복해라, 하고 남는 연애 둘 중 어느 것이 더 우스울까? 내가 그 연애를 이렇게 말해도 될까? 나는 스스로를,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을 기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빠와 헤어질 때 오빠에게 약속했던 것을, 나는 오빠를 만나지 않는 몇 년간 종종 생각했다. 오빠는 여전히 내게 중요한 사람일 것이라고 했던. 아마도 나는 그것을 잘 지키고 있는 것 같다. 이 연애에도 내가 같은 약속을 묶어놓아도 될까? 그것이 또 다른 부채감이 되지는 않을까? 

며칠 전에는, 이제는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으므로, 그냥 얼굴 한 번 보고 누가 무엇을 잘못했는가 어때야했는가 앞으로는 무엇을 할것인가를 따지지 말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일상적인 이야기나 주고받다가 키스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다 나는 이제 내가 B와 어떻게 키스했었는지를 잊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와서는 아무런 의미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서글펐다.


점잖게 정리하는 일기를 쓰려던 계획은 완전히 실패했다. 이건 draft인데, 앞으로도 완고를 못 낼지도 몰라. 애초에 관계의 문제인데 혼자서 뭘 어떻게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한 달간 나는 잘 연습했다니까. 이제는 하고싶은 말이 없다. 하고싶은 말은 직접 해야하고, 반대로 수신인에게 직접 할 수 없는 말은 하고싶어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고싶었던 말들을 다 죽이고 버렸다. 여전히 종종 길거리에 주저앉아서 엉엉 울고싶지만 예전만큼 일기를 오래오래 쓰지는 않는다. 그러니 엠바고를 풀어도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는지 할 수 없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내가 그걸 재봐야 소용 없지, 왜냐면 아무래도 B는 나를 자신의 삶에서 완전히 없는 사람처럼 취급하기로 생각한 것 같았고, 아마도 이런 일기도 읽지 않을 것이므로, 여기에다 'B를 위해서' 'B를 생각하며' 'B가 더이상 부채감을 갖지 않길 바라며' 무엇을 말하거나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말이야.

앞으로도 무슨 이야기가 하고싶어진다면 그건 B에게가 아니라, 드라마를 쓸 미래의 나를 위해서일 것이다. 인생에서 쓰레기가 없을 수 있다는 것은 드라마 작가의 특권이라고 했다. 이 모든 쓰레기같은 일기들도 언젠가는 다른 무엇의 재료가 될 것이다. 이것은 18년 6월 10일 오후 4시 17분의 쓰레기 조각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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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6일 새벽 네 시. 요즘은 새벽마다 깜짝 놀라 튕기듯 눈을 뜬다. 몇 달 전부터 약속한 홈파티가 있었고, 이음의 애인을 만났고, 원래부터 거기 있었지만 이제껏 내가 몰랐던 새롭고 좋은 것들을 발견했고, 술을 많이 마셨고, 집에 왔다. 오늘은 내내 길을 네 번쯤 잃어버렸지만 그래도 집에 잘 왔다. 길을 잃어버려도 어떻게든 어디든 도착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건 길을 잃어버린게 아냐! 그냥 다른 길로 온 거야. 오늘 MJ가 편지로 알려주었다.

이음이 요전번 살고싶은 이유로 약속했던 에그노그를 만들어주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뭐라고 쓸지 모르겠는데, 적합한 다른 말이 없고 그냥 "나는 너를 에그노그해" 쯤의 의미였다고 적어둔다. 또 크렘브륄레도. 정말 거짓말 보태지 않고, 나는 크렘브륄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커스터드 크림 맛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제껏 먹어본 크렘브륄레 중 가장 내 입맛에 맞았다. 스카치 블루를 넣었더니 더 맛있었다. 애인분 좋았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을 보여주었는데, 그 사람이 아주 근사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는 걸 발견하면 기분이 너무 좋아진다. 그리고 그런 사람과 있을 때 이음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어서도 새롭고 기뻤고, 이음이 애인에게 우리들의 이야기를 많이 했다는 것, which means 우리들이 이음에게도 좋은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어서도 기뻤다. 어떤 사람과 어떤 사람이 서로 의미있는 것을 다정하게 주고받는다는 건 좋은 일이고, 그들이 주고받는 것 중 내가 (혹은 나와의 관계, 시간, 그것에 대한 생각과 감정) 있다는 것도 좋은 일이잖아. "단원이 가르쳤어!" 했지만 정말 그랬겠어, 이제는 관계가 내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므로, 우리가 이 테이블에 함께 앉아있을 수 있는 것은 우리 모두가 끊임없이 노력하고, 이야기하고, 내어주고, 시간을 함께 보낸 까닭이라는 것을 안다. 단원이 그런게 아니라 우리가 그랬어. 그리고 아마도 이음은 이 대목의 어느 부분을 애인에게 읽어줄 것 같다. 그럼 단원이 영경을 정말 좋아했다고, 이음의 애인이어서도 좋았지만 정말로 사려깊고 다정한 사람같아서 꼭 또 보고싶어했다고도 전해줘. 

생각이 다 끝나기 전까지 당분간 오늘의 일기를 쓰거나 업데이트하지는 않으려고 했는데, 좋은 날이니까 기록해 두어야지. 물론 더 좋은 것 더 좋은 말들 많이 쓸 수 있는데, 미안, 나중에 더 쓸게. 오늘 고마워. 



습작. 

- 일기장에 이름을 붙일 수가 없다. "후회의 습작"인가? 연애나 다자연애만의 이야기는 아니고, 문득 생각했는데 오빠의 이야기가 정리된다면 앞으로 다자연애 얘기를 쓰든 연애 얘기를 쓰든 저 이름을 다시 쓸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앞으로 이만큼이나 후회하지만 후회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일은 많지 않을테니까.
- 이건 나에 대한 이야기지만 동시에 지응이나 우리를 생각하며 찾아낸 이야기이기도 하고

- 이제 "지응은" 으로 시작하는 문장을 쓸 수 없게 됐다. 지응은, 지응이, 아니 그런데 정말 지금도 지응이 그렇게 생각할까? 정말 지응이 그렇게 느꼈을까/느낄까? 이렇게 생각하면 덜컥 겁이 난다. 내가 '지응을 잘 안다'고 단언할 수 없으므로 자꾸만 무엇인가가 희미해져간다. 그래서 "나는"으로 시작해본다. 그러나 나와 우리에 대해서 말하려면 지응을 말할 수 밖에 없는걸. 그럼 나는 지응이나 우리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까? 사람에 대해 앞서 단정짓는 것은 나쁘지만, 영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것만은 아니야. 잘 구분해야 해. 잘 구분해서 생각하고 써야 해.
- 요 근래 지응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나로서는 너무나도 뜻밖이었으므로, 이제는 지응이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모르겠다. 지응과의 통화가 끝난 뒤 5월 1일 이후 내 일기를 읽어보았는데, 그게 '내가 의도했던 바와 달리', '내가 전달하고싶었던 바와 달리' 지응에게 아프게 읽혔을 거라는 것 정도는 이해했고,
- 그러니 조심스럽게 써 본다. 어떤 말도 지응을 상처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쓰지만 어쩌면 또 그럴 수도 있어. 그래도 상처주지 않기 위해서 말 걸기를 포기할 수는 없는거야. 인물들이 상처주고 상처받으면서도 무대에 서서 끈덕지게 상대방에게 힘들게 말하고 또 듣는 이유를 기억해.  
- 하지만, 만약 지응의 다음 말을 들을 수 있다면, 이 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써야 한다는 각오를 하고 쓴다. 그럴거야. 모르는 걸 들으면 알게 되고 변화가 생기고 그러면서 이야기가 나아가니까.


- 질문 : 왜 우리는 둘 다, 지난 2년 반이 황폐했다고 느낄까?
- 좋지 않은 대답 : 내가 이상한 사람이어서 / 지응이 이상한 사람이어서
- 꼭 생각할 것 : 지응은 나와의 연애에 열심이었고, 좋은 애인이었다 / 나는 ________________
- 어쩌면 : 우리의 마음이 아파서
- 이제 "우리"에 대해 말할 수 없다면 최소한 : 내 마음이 아파서.

- 나는 어디가 아팠을까? 무엇이 아팠을까?
- 나한테 "컴플렉스"라고 부를 만한 게 있다면 뭘까? 나는 어디에서 트리거가 눌리지?


- 몇 년 전으로 돌아가보자. "네가 예뻐서 만나는 건 아니지." "걔들은 객관적으로 예쁜 애들이고 넌 아니니까, 사람들이 너를 다르게 대할거고, 너는 상처받을거야." "걔들이랑 함께 있으면 너는 비교당할거야." "내가 너랑 친구인 게 예뻐서는 아니잖아."
- 이 말들은 모두 나와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나왔고, 정말이지 내 인생의 어느 시점 이후 내 세계는 명백하게 예쁜 사람과 예쁘지 않은 사람으로 쪼개져 있었다. 나는 항상 사람들이 나를 예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예쁜 사람들만큼 좋아하지 않을거라고 생각했어. 비교당하고 차별당할 거라고 생각했다.

- "네가 예뻐서 만나는 건 아니지" 로 시작됐던 ㄷ의 말들. 정말 그게 문제의 시작이었을까? 나는 이제 어쩌면 ㄷ이 내가 기억하는 만큼 최악의 사람은 아니고, 그 연애가 그렇게까지나 거지같았던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그냥 내가 잘 몰랐던 거지. 한편 그 연애를 겪고 나서 내 자존감이 허덕이게 되었던 것은 사실이었으나,
- 저 말은 그냥 확인사살이었다. 왜냐면 나는 그냥 알았어. 알고 있었거든.

- 조금 더 전으로 돌아가볼까? 내가 기억하는 "내 세계"는 열 다섯 살부터 시작된다. 내가 나에게 이름을 주었을 때. 그 때 나는 교회 커뮤니티에 속해 있었고, 거기는 열댓 중학생들이 모여서 서로 돌려가며 사귀고 헤어지고 지지고볶고 하는 그런 데였다. 그 연애의 서사에서 나는 늘 한 발짝 떨어져 있었다. 왜냐면 모두 함께 어울렸어도 모두 예쁜 애들을 좋아했고, 나는 예쁘지 않았으며,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 아니 근데 정말 그래? 되짚어 보았을 때 누나 좋아해요 하고 고백하고 나를 졸졸 따라다니던 애들이 (그것도 내가 대학생이 될 때까지 n년간을) 최소한 둘쯤은 있었고, 사실 내가 마음을 먹었다면 얼마간은 그 관계도에 뛰어들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럼
- 대체 내가 예쁘지 않은 사람이라는 생각은 어디서 왔지?
- 물론 이 사회에서 우리는 모두 그것을 알게 될 수 밖에 없지만, 그리고 여전히 어느 지점 쏘 트루라고 생각하지만,
- 예쁜사람-연애 / 예쁘지않은사람-친구, 나는 세계를 이렇게 둘로 쪼개놨지만, 사실 중학교때는 물론 고등학교, 동아리, 학부, 학회, 학생회, 학관, 대외활동, 그냥 내가 몸담았던 모든 곳에서 한 명 쯤은 나를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다. 싸이월드를 떠나기 전까지 나는 나를 연애대상으로 좋아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그러니까 짐작하는 것이 아니고 최소한 "너를 좋아해", "내가 예전에 너 좋아했었어, 몰랐지?" 그리고 "걔가 너를 좋아한대"라고 직간접적으로 고백받거나 정확히 전해들은 사람들의 이름을 다 적어놓은 리스트를 만들었다. 지금은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돼서 다 잊어버렸는데, 그래도 스물 세 살 까지 한 열명쯤은 됐을거야.
- 그러니까

- 아니, 그런데 대체 왜? 
- 특히나 연애하고 싶은 사람 = 예쁜 사람이라는 등식이라면
- 정말 왜???????????????????????????????????????????????? 아니 그래도 저만큼쯤 됐으면 혼자 착각할 법도 하지 않나? 정말로? 대체?

- "너를 좋아하는 애들은, 더 예쁜 애들을 좋아하고 싶지만 연애시장의 경쟁에서 밀려나서 만만한 상대를 선택한거야" 라는 말은 이제 내 마음속에서 완전히 폐기하도록 한다. 왜냐면 이건 나만 후려치는게 아니라 내 애인들까지도 다 후려치는 말이니까. "내가 아마 네가 만날 수 있는 사람들 중 가장 좋은 사람일걸" 이라는 말에 확실하게 대답하면, 어쨌건 그것이야말로 내 최악의 연애였고, 최악의 애인이었으며, 그는 애인의 자존감을 후려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견디기 힘들 만큼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었다.
-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돼서 기뻐! 진심으로. 


- "네가 예뻐서 너랑 연애/친구하는건 아니지" 라는 말은, 아마도 이런 의도였을 것이다. "네가 예쁘건 예쁘지 않건, 네가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너랑 친구야" 이 상냥하고 좋은 말들이 나한테는 이렇게 들렸다 :
- "너는 못생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덮을 만큼 성격이 좋으니까, 그래서 너랑 친구일 수 있어."
- 왜 못생기면 성격이라도 좋아야한다잖아. 그럼 대체 나는 얼마나 성격이 좋은 사람이어야 하는걸까? 나는 예쁘지도 않고, 잘 하는 것도 없고, 매력적인 뭔가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닌데, 그리고 사실 막 당당하게 반짝반짝 빛나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고 그런 사람도 아닌데, 그러면 나한테 남은 건 정말 사람을 열심히 좋아하고 잘 대해준다는 것 뿐이었고,
- 그래서 나는 정말로 열심히 그렇게 했다. 사람들을 내 곁에 붙잡아두기 위해서.

- 처음에는 내가 가진 제일 예쁘고 잘 익은 열매를 내 몫으로 남겨놓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으로 시작했다. 잘 익은 것도 주고, 없으면 덜 익은 것도 주고, 그러다 줄게 없으니까 아직 봉우리가 맺히지 않은 꽃도 다 따주고, 가지째 꺾어주고, 내년에 파종해야 할 씨앗도 그냥 줘버리고, 줄 게 없어서 들풀인지 뭔지 모를 것들까지 싹 뽑아서 다 내줘버렸던 것이다. 그러고 나니 나한테 남은건 너무 황폐해져서 다시는 무엇을 심거나 키우기 어려운 땅이었다.
- 내가 준 것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정말로 소용되었나, 나에게 중요한 것을 주었는데 그들이 그것을 좋아했나는 별개의 문제이다. 
- 그래서 나는 모든 관계들에서 나의 노력을 말하고, 왜냐면 그것만이 내 밑바닥에 놓인 전제였고 이 관계의 유일한 이유였으므로, 내가 노력하지 않으면 이 관계가 유지되지 않을 리 없다고 생각했고, 항상 내가 더 노력하고 더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 정말 그랬을까? 아니. 생각해보면 나는 받은게 정말 많은데, 사람들이 나를 아껴주고 위해주고 노력해주었다는 것을 다 알았는데, 그들의 행동만 보고도 알 수 있었어야했는데, 그들이 말하지 않으면 그걸 다 인정하지 않았다. 직접 '단원을 좋아해', '내가 단원을 위해 이렇게 노력해' 하고 꼭 짚어서 말해줬어야했어.
- 왜 그랬냐면, 그들의 노력이 부족했던 게 아니라, 나는 내가 그런걸 받을 이유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게 그런건 줄 몰랐던거야. 받고도 잘 몰랐어.
- 마음밭이 이미 황폐해졌다면 누가 무엇을 주어도 심고 키울 수 없다.

- 며칠 전 내가 기어이 바닥으로 쳐박혀서 트위터에 티스토리에 울고불고 난리를 쳤을 때, 어떤 사람들은 아마 그때쯤 내가 헤어졌다고 짐작했겠지만, (정작 헤어진 때는 그것보다는 점잖았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그런게 아니었고,
- 그냥 지응을 생각하고 느낌의 사람들을 생각하고 또 내가 일기에서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가족을 생각하다보니,
- 모두가 나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내가 원하는 만큼 충분히 나를 좋아하지는 않는", 왜냐면 "내가 원하는 것을 함께 원해주지 않는" 사람들이어서, 종래엔 모두가 나를 떠나고 쓸쓸한 들판에 혼자 남을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그것이 슬펐어. 그래서 더 이상 살고싶지 않은 기분이 되었던 것이다.
- (그리고 이걸 진짜 너무 변명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헤어진걸로 그렇게... 난리를 치지는... 지금은 그것보단 점잖은... 그치...?)

- 하지만 봐, 정말 그랬어?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단원? 내가 이쯤 쓸 수 있는 것은,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고 또 정말이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구구절절하게 깨달아버렸기 때문이다.
- 지금 이렇게 쓸 수 있는건 내 마음밭이 잘 자랐기 때문이야! 모두가, 그러니까 내가 지금 생각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내 생각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나한테 뭔가 좋은 것을 많이 가져다주었고 내 밭에 씨앗도 심어주고 물도 주고 함께 다독여주어서, 물론 나도 노력했지만, 그래서 지금쯤 다시 여기에 싹이 텄고 잎을 틔웠고 다시 좋은 열매를 맺을 준비가 천천히 됐기 때문이야. 완전히 다 변한 건 아니지만, 준비가 된 것 같아. 아마 그런가봐. 

- 이 날 내가 속으로 이름을 불렀던 사람들이, 그것이 자신의 이야기인 줄 아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한번씩 손을 내밀어주어서 놀라웁게도 좋았다. 나 이제 그게 뭔지 어떤 의미인지 알아! 


- 나는 내가 "연애하고싶을 만큼 예쁜/매력적인 사람"이 결코 못 된다고 생각했고, "섹슈얼한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인정하지 않았다.
- 왜 내가 나를 스쳐지나간, 그리고 나도 좋아했고 조금 더 바랐던 모든 관계들을 썸이라고 생각하거나 인정하지 못했냐면, 그들은 모두 행동으로 열심히 신호를 보내고 있었지만, 그들 중 아무도 직접적으로 나한테 "예쁘다"고 말하지 않아서, "너랑 키스하고 싶다"고 말하지 않아서.
- 그러니까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직접적이고 유일한 신호는 그런 것들이었다.
- 이런 걸 사귀기도 전에 말하는 건 좀 웃겨, 그치? 그리고 누가 그런 티를 흘리면 나는 또 재빠르게 도망갔다. 아니 대체 왜 나한테 저런 이야길 하지, 이쯤 직접적으로 말했으면 아마도 나를 꼬셔보려고 그러는 것 같은데, 왜그러는지 모르겠고, 아니 대체왜? 왜 나한테 그러지? 잘 모르겠고 저 사람은 어딘가 이상하니까 일단 난 발을 빼겠어!

- 그리고 연애를 제외하고 내 몸에 손을 댔던 사람들은, 어... 내가 자는 줄 알고 내게 뭔가를 했거나 (덕분에 정말 오래 자는척해야했다) 삼일간 나를 따라다녔던 지하철에서 만난 성범죄자였거나, 새내기 후배를 시위 데리고 나갔다 그랬던 진보적인-세월호-문재인캠프-대학생 선배였거나 술버릇 손버릇 나쁜 진보적인-학생회장 (역시 자기가 진보어쩌구 하는 사람들이 제일 유해하다) 아니면 역시 술먹고 지랄했던 교회 오빠 (교회오빠도) (사실 형이라고 불렀지만) 아니면 하여튼 그런 사람들 뿐이었고 
- (이들 외에도 여성 가해자'들'이 있었다는 것도 짚어야 한다는 기분이 되는데,)
- 그런게 정말 내가 좋았거나 예뻤거나 그래서 그런게 아니라는거, 잘 알잖아. 
- 성범죄는 만만한 사람을 피해자로 삼는다.
- 하지만 가끔 생각해, 아마 그들이 내가 만만해서가 아니라 예뻐서 그랬다면 내 기분이 쪼끔 더 좋았을거라고.
- 나 생각났다. 그때 그 가해자가 나보고 예쁘다고 했는데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난 뒤에 '남자'한테 그런 말을 들었던 게 처음이어서, 그래서 사실은 기분이 좋았고 혼란스러웠고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으면서도 더 일찍 그 자리를 뜨지 못했어. 나중에 생각하고 너무 수치스러웠고 슬펐어. 하지만 이제는 그걸 수치스러워했던 나를 가엾어할 수 있게 됐다! 대체 예쁘다는 말이 뭐라고, 단원아. 

- 팔짱을 끼고 손을 잡고 걸었어도 썸인걸 몰랐으며 내내 손을 잡고 영화를 봤어도 그게 그런건 줄 몰랐지. 왜냐면, 나랑 손 잡고 싶을 수는 있어도 그게 나랑 키스하고싶어한다거나 섹스하고싶어한다는 의미는 아니잖아.

- 그러니까 그 스무살때부터 최근까지의 모든 얘가 왜 그럴까? 아니 걔가 널 좋아하는거라니까! 아니 근데 그냥 나랑 친구하고싶고 진짜 친하고 싶은 걸수도 있잖아, 하는 단원의 답정너는 "단원은 좋아할만한 사람이야"라는 전제가 쏙 빠져있었기 때문이었고, 사실 내가 듣고싶었던 대답은 "걔가 너를 좋아해"가 아니라 "단원은 누군가가 좋아할만큼 예쁜 사람이야" 였던 것이다.
- 알겠지 여러분? 기억해... 사람이 변하는 건 쉽지 않고 나는 앞으로도 조금 찡얼거릴거니까...... 이게 답이야 적어놓고 외워줘...
- 그러니까 "너는 예쁜 사람이야"라는 말이 자존감 문제를 해결하는 바른 정답인지는 모르겠고, 나는 예쁘지 않아도 사랑받을만한 사람이야! 이게 더 좋은 자존감이라는 것도 알겠고, 결국 누구한테 사랑받지 않아도 너는 괜찮아 하고 가야하지만, 그러니 더 많은 것들을 검토하고 덧붙여야 한다는 것을 어렴풋히는 알고 있는데, 일단 지금의 나에게는 여기까지만 오는 것도 아주 중요한거니까, 

- 썸은 양쪽 모두가 좋아할 때에야만 성립할 수 있다.
- 또 내가 인정하지 못한 한 쪽은 뭐였냐면, 내가 가진 섹슈얼한 욕망이었다. B에게 '누군가에게 섹슈얼한 끌림을 가져본 것은 네가 처음이다'고 말했던 적 있다. 그러니까 그 전까지는,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고 무엇을 바란다고 생각할 때, 그건 그냥 '좋은 사람이고싶고 가까워지고 싶고 더 얘기를 많이 듣고싶고 친해지고 싶고' 정도였다. 그 전에 내가 짝사랑했던 마음은 그런거였고 내가 연애를 시작했던 마음도 그런거였다. 
- 나는 내 스스로의 욕망을 거세하다시피 했단 말이야.
- 왜냐면,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고싶어하는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예쁘지 않은 사람이 예쁘다는 말을 듣고싶어하는게, 연애하고싶을 만큼 예쁘지 않은 사람이 누군가와 연애하고싶어하는게, 누군가의 성적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섹슈얼한 기분을 느끼는게?
- 오빠가 있었지만, 오빠와의 관계는 늘 "좋은 연애"였기 때문에 예외로 놓이지. 
- 물론 다른 누군가가 그랬다면야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말해주었겠지만, 이건 나고, 나한테는 그렇게 너그러울 수 없었으므로, 가질 수 없는 것을 욕심내는 건 비참하다고 생각해서. 

- 그래서 나는 그냥 아주 옛날부터 감히 연애나 그런건 꿈도 꾸지 않았고 내가 가진 욕망도 묻어버렸던 거였다. 내가 어떤 순간에 뭔가를 느꼈거나 바랐을 수도 있는데, 그게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런게 있는 줄도 몰랐었던 것 같아. 어쩌면.

- 그런데 왜 그걸 인정하게 됐냐면, 교환학생.
- 처음에는 그냥 모든게 와 역시 프렌들리 아메리카! 였다. 외국 사람들 너무 상냥하고 프렌들리해! 역시 우리는 모두 친구친구! 서로 자존감 높여주는 예쁘다는 칭찬 잘 해주는 유럽! 이런거. 왜 데려다주겠다고 고집하지? 왜 나를 따라오지? 왜 내 손을 잡지? 왜 전화번호를 물어보지? 왜 나한테 술을 사주고 왜 나한테 기대고 왜 파티에 다녀오는 길 내 방 창문에 돌을 던져서 나를 불러내고 나랑 쓸데없는 얘기를 하고싶어하지? (진짜 너무 쓸데없는 얘기였다 너 쏘 샤이해서 식당에서 만나도 말해보고싶은데 말을 잘 못하겠어, 그래서 좋아 내가 다음번에 너랑 마주치면 너네 테이블에 앉아서 같이 얘기할게! 하고 약속해줬다) 왜 나를 자기 생일파티에 초대하고, 왜 나랑 침대에 앉아서 얘기하고 싶어하고, 왜 자꾸 내 팔을 만지지? 잘 모르겠지만, 절대 다른 걸 바라는 건 아닐테니, '아마 나랑 친구하고싶은거겠지'!
- 맞아 나는 친구들이랑 그런거 잘하고 좋아하니까!
- 정말이지 많은 것들이 명백한 무엇이었는데도,
- 심지어는 쏘 프리티하다는 말도 심심찮게 들었지만, 그건 그냥 캣콜링이고, 캣콜링은 불쾌한 거고,
- 어떤 사람들이 나랑 자고싶어했다는 건 알겠는데, 그건 아마 그들이 옐로피버거나 내가 여기서 제일 만만한 어린/아시안/여자애여서였을거야,

- 이 모든 생각들이 뒤섞여 있었는데, 그래서 너무 혼란스러웠고, 하지만 나도 어렴풋히는 알고 있었다. 그만큼의 사회적 지식 정도는 갖춘 사람이었어.
- 다만 그것을 나한테 적용하기에는, "나는 누군가의 욕망이 될 수 없는 사람이다"라는 지나치게 강력한 전제가 깔려있었다.

- 어쨌건 나는 그걸 차근차근 인정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그 과정에서 강제로 사회화되었던 것이다.
- 왜냐면, 그걸 무시하면 그 다음에는 내가 원하지 않는 일들이 일어날 거라는 걸 명백하게 느낄 만큼은 됐거든.
- 친구의 친구 모임에서 만난 어떤 남자애랑 술을 먹을 수는 있지만, 걔가 나를 바래다줄수도 있지만, 그건 우리가 진짜 친구가 됐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그 다음 내 방에 들어가고 싶다고 조른다면 거기서까지 어서와 친구! ^0^ 할 수는 없잖아. 그만큼의 바보는 아니었고...
- 그래서 나는 항상 더 이상 가면 내가 수습할 수 없겠다고 느껴지는 임계점까지 참았다가 화들짝 놀라서 픽 돌아서곤 했다. 하지만 어쨌건 그 과정에서 정말 강제적으로 배웠으므로, "임계점"이 점점 적당한 기준점에 가까워지기는 했다. 처음엔 집 앞에서 거절했으면 그 다음 사람은 데려다주겠다는걸 거절하고, 그 다음엔 전화가 걸려오는 걸 받지 않고, 그 다음엔 전화번호를 물어봐도 주지 않고.
- 누군가가 나에게 플러팅을 한다고 생각했을 때 내가 그걸 그냥 내버려두었던 건, 많은 경우 그냥 누군가가 나를 욕망하는 것처럼 보이는 게 좋아서였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주 드문데, 근데 그 사람이 이런걸 바란다면, 내가 불편해하지 않는 선까지 그냥 그러게 내줘도 좋잖을까. 
- 그 과정 어디에서도 '내가 상대방을 좋아하는가? 내가 상대방과 무엇을 하고싶은가?' 를 고려하지는 않았었던 것 같다.

- 하지만 거긴 외국이었고, 나는 교환학생이거나 여행객이었고, 너무나도 낯선 상황, 다양한 사람들, 다양한 맥락들을 한꺼번에 아울러 받아들이려니 아주 벅찼다.
- 심지어 나는 그때 브리나(19살)한테, "대체 여기서는 어떻게 친구가 되는거야being friend? 친구의 친구랑 친구하고싶으려면 어떻게 해야해?" 라고 정말 진지하고 절박하게 물어봤고, 그게 정말 혼란한 고민이었기 때문에, 걔가 좀 이상한 표정으로 날 봐서 "연애하고싶은거 말고!" 하고 덧붙여야 했던 것이다. 플러팅이랑 친구하는거랑 어떻게 구분해? 플러팅으로 소비되는 관계 아닌 거 하고싶으면 어떻게 해야해?

- 어쩌면 거긴 외국이었고, 그러니까 좀더 다양하게 예쁜 사람들을 좋아하는 곳이라고 생각했고, 내 몸무게가 날씬한 편에 속하는 곳이었다. 그러니까 거기서는 조금 예쁜 사람 취급 받아도 이상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 토론토에 있었을 때 엉엉 울면서 "내 안의 여성혐오"에 대해 고백하는 글을 썼던 적 있었는데, 골자는 이것과 비슷했다. 그때쯤 사람들이 내게 예쁘지 않다고 말한 게 내 안에 큰 가시로 박혀있었고 내가 그것때문에 앓고있었다는 것을 처음 인정했다.
-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왔고. 조금은 바뀌었다. 내 안에 "예쁜 사람만 할 수 있는 거"라고 정해놓은게 몇 가지 있었는데, 이후 나는 "예쁜 사람만 바를 수 있는" 레드립스틱을 바르거나, "날씬한 사람만 입을 수 있는" 노출이 있는 옷을 입거나 하는 정도는. 
- 그러나 여전히 나는 예뻐! 아니 충분히 예쁘지 않아! 아니 그러니까 내가 예뻐? 로 앓았고
- 내게 한국은 "너 예쁘다! 전화번호 줄래?" 이상의 대화와 섬세한 관계맺기가 가능한 곳이었고, 이전까지 그런 방식들로 관계를 맺어온 내가 있었고, 원래의 나와 사회화된 내가 뒤섞여 또 재사회화를 해야했고, 
- 그것이 지금까지 이렇도록 더디게 이루어져 온 것이다. 사실 난 아직도 내가 사회화 덜 된것 같다고 여겨져...
- 그래도 이쯤 되면 내가 썸 탈때 썸이라고 인정할 수 있고, 되짚어보니 그때 그런것들이 말마따나 썸탔던 것이었던 것 같고, 그치. 이건 그냥 그들이 얼마나 노력했는가? 얼마나 나를 좋아했는가? 이런걸 인정하고 그렇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그 때 그렇게 앓았던 나를 다독일 수 있게 돼서 그래. 너 그때 예뻤고 다른 사람들이 너를 좋아할만한 사랑스러운 사람이었어. 그러니까 다들 너 좋아했지. 



=

5월 18일 오전. 6일의 기록엔 (이 연장선상에서) 연애에 대한 다른 이야기가 더 붙어있는데, 지금에 와서는 연애가 크게 중요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서 잘라낸다. 대신 다른 이야기를 붙여 쓴다.

- 아침엔 깊이 파인 앞섶을 브로치로 적당히 여며 잠그며 생각했다. 한때 나는 (갑작스레 그것을 내게서 발견하고 놀랍고도 기쁜 나머지) 온 동네에 나도!!!! 가슴이 있어!!!!! 이건 내 가슴이야!!!!!!!!!! 하고 외치고 다니고 싶었던 때가 있었나봐. 그땐 그런 기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외국에서야 입을 수 있지만 한국에서는 입기 어려운' 옷들을 기를 쓰고 입고다니다 보니 이제는 적당히 힘이 빠져서 그래... 뭐... 이거 가슴이야... 나도 가슴 있어... 정도로만 이야기하게 된 것도 있고, 네가 만나는 사람들은 너에게 가슴이 있다는걸 몰라서가 아니라 있지만 그걸 상관없어하는거니까 굳이 그렇게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하게 돼서.

- 페미니즘 잡지 이프(IF) 2004년, 필명 "다꽝"의 글을 부분부분 옮겨놓는다 :

    혼자 있는 동양여자는 '옥떨메'일지라도 놈들이 바글댄다. 게다가 여행의 십계명은 공으로 얻을 수도 없어.
    - 무척이나 잘해줬어, 비행기를 탈 때부터, 온갖 친절은 다 베풀고. 근데 내가 태국여자가 아니라고 하자 그 다음부터 아예 한 마디도 안 하는거야. 태국에 다녀온 내 친구가 말했다.
    아, 진짜 백인놈들한테 태국여자처럼 보이기 싫더라, 도 덧붙였다.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일까, 그저 나는 비포선라이즈 놀이를 하고 있을 뿐인데, 라고 대꾸했다.
    우리들은 쿨한 원나잇을 즐겼다.
    "넌 '태국여자'가 아닌 것 같냐?"
    이죽거리는 친구 앞에서 나도 '태국여자'처럼 보이기는 싫었다고 고백했다.
    인도의 고아 해변에서 똑같은 비키니를 입고 있는데도 동양여자인 나만 성희롱에 시달렸을 때처럼. 그때 나는 처음으로 백인여자가 되고싶었다. 비키니 상의를 벗고 가슴 선탠을 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워서 그들과 똑같은 배낭여행객이 되고 싶었다. 사람들이 날 '태국여자'로 보지 않고 같은 배낭여행객으로 여겨주길 바랐어.
    '동양의, 영어를 못하는, 혼자 있는, 작은 여자애.'
    영어로 나를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관계를 목적으로 누군가에게 말을 건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단지 내가 필요한 것에 대해서 분절적으로 방어적으로 의존적으로 설명해내야만 한다. 
    동양의, 영어를 못하는, 혼자 있는, 작은 여자애. 이 네가지는 유기적으로 관계가 있다. 
    나는 남자의 관심과 도움을 받아 마땅한 존재가 된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나는 단지 동양의, 영어를 못하는, 작은 여자애기만 하면 된다는 것도 알았다. 나를, 나의 의식을, 나의 욕망을 나는 설명할 수가 없고 그들은 들을 필요가 없다. 
    내가 그들을 존중했듯이 그들도 나를 동양여성이 아닌 한 사람으로서 존중하고 만났을지 모른다. 그들이 지겹도록 "cute"를 말할 때, 장난치며 그 큰 등짝에 작은 몸을 업어줄 때, 나는 헷갈린다.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를 따지는 것이 과연 온당한거야?
    하지만 나는 이미 '태국여자'의 자장 안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건 뭐 '옥보단'식 기승전결로 끝을 내는 기분. 진탕 놀다가 회개하고 깨달음을 찾아 절에 귀의하는 옥보단의 주인공 말이다. 하지만 나는 겨울이 닥치면 시디와 책과 이태리 타월을 챙길 것이다.

- 그러니까 내가 "반강제적으로 사회화"되었다고 느꼈던 변화, 나 자신의 "가슴을 발견"한 경험들, 나 자신을 성찰하고 내 자존감을 짚어보도록 도와주었던 시간들은 실상 내 자신이 누군가에게 '태국여자'로, Asian whore로, 포르노그래피의 대상으로, 다리 사이의 구멍으로 환원되었던 때였던 것이다.
- 포르노의 대상으로 취급당하고 나서야 자기자신을 돌아보고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너무나도 끔찍한 일이 아닌가?

- 하지만, 그렇지 않고서도 이것들이 가능하단 말인가? 내가 보고자랐던 세계에서 "여자"는 대개 포르노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했고, 그러니 (내내 그것을 기피해왔다가) 포르노의 대상으로 취급당하고 나서야 내가 "여자"라고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닐까?
- 그리고 이제 나는 또다시, 나를 "여자"로 취급하지 말고 사람으로 여겨달라고 말하기 위해 애쓰고 있고

- 그래서 나는 항상 다른 여자애들이 어떻게 "여자"가 되는지 궁금했다. 분명히 그들도 나와 같은 고민이나 생각을 한 번쯤은 겪었을텐데, 그들은 어떻게 자기가 이 사회에서 "여자"로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또 어떻게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서 애쓰고 있을까?
- 그들은 나보다 쉽거나 어려웠을까? 나보다 모호하거나 정확했을까? 더 자연스러웠을까 아니면 더 어려웠을까? 이렇게 고통스럽지 않아도 가능했을까? 세계의 반절쯤은 나와 같은 것을 겪어왔고 또 겪어야 한다는 말일까?
- 그래서 아이유의 <스물셋>을 보고 엉엉 울었다. 내가 이렇게 미칠것같이 끔찍한 기분이라는 것을 누군가는 알아주었던 것 같아서, 그리고 좀 더 편하게 나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될거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하지만 그건 너무 어려워. 나는 지금 몇 년째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잖아.


- "뻔히 보이는 플러팅"을 싫어한다. 틴더에서 나는 끊임없이 그런 것들을 본다. 처음엔 조금 좋았지. 누군가는 나와의 대화에서 "이런 위안을 얻을 줄은 몰랐다"고 말했고, 나는 이것이 플러팅이라면 후졌고 진심이었다면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친구들은 입을 모아서 빤히 보이는 수작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슬퍼졌어.
- 내가 당신들을 모르는 만큼 당신들도 나를 모른다. 그러면서도 빤히 보이는 이야기를 하는건, 결국 내가 무엇이건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내 다리 사이의 구멍이라는 뜻이다.
- 나 자신의 존재가 "다리 사이의 구멍 하나로 환원되는 기분"은 아주 끔찍해서 - "보지로 환원되는"이라고 쓰지 않는 건 내가 아직도 내 몸과 화해하지 못했다는 걸까? - 나는 묻고싶었다. 그것보다는 의미있는 뭔가가 있었던 게 아닐까, 그냥 내가 아무 asian whore나 아무 구멍이나 아무 "어린 여자 스탭"이나 그런건 아니었고, 그래도 내가 조금이나마 재미있는 사람이었다거나 나랑의 대화가 똑똑하고 유쾌했다거나 내가 그래도 재빠르고 야무지게 일을 잘 했다거나, 그래서 '한 사람으로 존중받았던' 순간들이 있었던 건 아닐까?
- 내가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건 아닐까? 이 세상이 그렇게 단순하게 이루어진 것만은 아냐. 하지만 나는 내가 이미 그 "자장 안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 조금씩 새로운 생각들을 하게 되고,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고, 나와 내 경험과 내 세계를 설명할 새로운 언어를 얻게 될수록 나는 점점 더 ________ 한 기분이 된다. 새로운 언어들이 한 개씩 늘어날 때마다 내 몇 년의 (혹은 20년간의) 경험들을 죄다 까뒤집어보고 있는데-... 사실 넌 '최근 몇 년간 틴더에서나 현장에서나 해외에서만' 그렇게 취급됐던 거 아니야. 그 전에도 어느 순간들엔 이미 그랬다. 모르지 않았어. 웃으면서 약속 마치고 돌아와서 기분 나빴던 경험들 분명히 있었고, 설명할 수 없으면서도 불편해서 답장하지 않는 카톡들이 많았잖아. 저 선배는 왜 저렇게 말하지? 왜 나는 기분이 별로지? 그걸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얻을 때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고 공부가 필요했지만, 맞아, 나는 모르지 않았고 기분이 나빴다. 

- 상대방을 오해하거나 오독하지 않으려고 내 기분을 덮었지만, 내 기분이 나쁘면 그건 나쁜거 맞아. 이제까지 그랬으니 앞으로도 그럴거야. 다음 주에 잡아놓은 약속을 어떻게 할지 내내 고민했는데 결정을 내렸다. 만나보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를테니까 일단 만나보겠다는 생각도 하지 말고, 이런 내 기분을 설명하려고 노력하지도 말고, 안읽씹하면서도 끙끙거리지 말고, 그냥 차단할거야! 나는 기분이 나빴고, 아직 왜 기분이 나쁜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서 결정을 못 내렸지만, 어쨌건간 내 기분을 믿는 것이 현명하다는걸 이제 배웠으니까.
- 이 약속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지만, 나는 이미 상대방이 남근중심주의를 극복하지 못한 제1세계 사람이라는 의심을 하고 있었고, 이제 그 반대편에는 내가 어쩔 수 없이 - 아무리 벗어나려고 애써도 - "보지가 있는 아시아 여자" (여기서 "여자"가 이미 보지를 함축하고 있다면 이건 역전앞같은 표현일까?) 의 자장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버렸다.


- 그 어느 순간들에 그들이 나를 존중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어쩌면 그들을 존중하지 못했던 것은 나였는지도 몰라. 누가 알겠어 그걸?
- 서로를 존중하고 존중받는 관계들은 분명히 가능하다. 그간 나는 존중하고 존중받는 사람들을 아주 많이 만났고, 또 우리가 그런 관계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눈물겹게도 애썼다. 그 방법을 잘 몰라서 "오빠" 대신 꼭 "형"이라고 부른다거나, 합숙때 기어이 남자숙소에 기어들어가서 웅크리고 잤거나 그래왔던 것과는 다른 방법으로. 서로의 몸에서 섹슈얼리티의 - 정확히 서술하면 "포르노의" 맥락을 걷어내기 위해서 애썼고, '가슴이 있다는 걸 몰라서가 아니라 있지만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니 중요한 것은 욕망과 선택과 합의의 문제임을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몸으로 재확인하려고 애썼다. 
- 상대방들이 그것을 어떻게 느꼈는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이제까지는 아주 성공적이었고 그래서 나는 이제 안전하고 자유롭게 존중받는 관계들이 있다고 느낀다. 사랑스럽게도.

-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그런 방식으로 친구가 될 수는 없는거야. 그렇지?
- 이 기울어진 운동장 위의 모든 신화들을 무너뜨리지 않고서는 내가 바라는 것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결코 어떠한 진공상태로도 되돌아 갈 수 없다는 것도 알지. 

-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 몇 년째 내가 반복해왔던 같은 이야기로 돌아간다. 모방으로밖에 욕망할 수 없다면, 개중 선택하자. 신화와 신화 사이에서, 자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야 한다면 더 많은 신화를 만들자. 진공상태가 되기 어렵다면 스펙트럼을 조각조각 쪼개자. 그리고 더 정확하게 말하자. 


- 마치 고해성사하듯 어렵게 쓴 이 이야기를, 되짚어보니 여러 번 썼더라. 길게 쓰기도 하고 지난 3년에 걸쳐 일기마다 조각조각 끼워넣기도 했더라. 결국 나는 내 문제가 뭔지 알고 있었고, 그러면서도 잘 몰랐던거야. 지금은 잘 알게 됐다고 믿지만 나중에 진짜로 잘 알게 됐다고 느낄 때가 올지도 모른다. 같은 이야기는 말하는 때에 따라 매번 달라지고, 그 간격만큼 나는 바뀌었다는 이야기겠다. 변화가 성장을 담보하지는 않지만, 이 변화가 생경한 감각들을 넓혀가는 것에서 왔다면 긍정적인 것이라고 믿어본다. 어쩔 수 없이 이 세계는 필연적으로 주관적으로 재구성되고, 나와 남이 다른 만큼이나 나와 그때의 나는 다르다. 선형적인 진보가 환상이라면,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그저 더 많은 다른것들을 감각하는 식으로밖에는. 그때는 맞았지만 지금은 틀린, 또 내게는 맞지만 누군가에게는 틀릴 이야기를 생각하며 이걸 드라마에 어떻게 잘 써먹어볼까 했는데, 바로 그걸 고스란히 다룬 것이 지맞그틀이니 그냥 홍상수 영화를 다시 보는게 낫겠다, 했고 자존심이 좀 상했다. 홍상수 영화를 보고싶다니! 
- 2018년 5월 21일 새벽에 마무리. 벌써 두 주 전의 이야기라 어떤 부분들은 다시 씌여져야 하지만, 그렇다면 어차피 지금 쓴 부분들도 나중에는 다시 씌여져야 할 것이므로 그냥 날짜를 붙여 기록하는데 의의를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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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W : thinkofmeee

secret 2018. 5. 17.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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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의 습작

2018년 5월 1일 화요일

실비아가 집을 비운 사이 필립은 올리버와 섹스를 하고 죽을만큼 괴로워한다. 실비아는 올리버에게, "당신을 용서했어요"라고 말하고 떠난다. 올리버는 필립 앞에서 무릎을 꿇지만 필립은 끝내 도망친다. 자기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도 어려웠겠지만, 실비아를 배신했다는 죄책감도 필립의 목을 졸랐을 것이다. 바보같은 사람. 바보같은 필립. 필립은 정말 멍청이다.

맞아, 잘못됐지. 게이들의 위장결혼과 관련해 워마드에서 공격적으로 나왔을 때 ㄱ선배와 이 얘기로 날카롭게 다툰 적 있었다. ㄱ선배는 프라이드를 본 직후였고 가엾은 필립의 편을 들기 위해 열심이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같은데) 아니, 그러니까 필립이 용서받을 수 있는 지점이 있다면, 걔는 그래도 진심으로 노력했잖아. 실비아와 결혼하고도 실비아에게 좋은 남편이 되려고 노력했고 - 실패했지만. 필립이 실비아를 배신했기 때문에 실패였다는게 아니라, 자기 안에 황무지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바로 곁에 누운 사람에게도 내줄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실패했다 - 올리버와 섹스하고도 끝끝내 무지무지 괴로워했잖아.

그러니까 필립은 얼마나 괴로워해야할까?
얼마나 괴로워해야 용서받을 수 있을까?

필립은 영영 용서받을 수 없을까? 만약 누군가가 필립을 용서할 수 있다면 그건 누굴까?

조금 더 반듯한 시작이었으면 좋았을것이다. 예를 들면 필립이, 나 동성애자인것같아, 하고 실비아에에 고백하고, 실비아의 동의를 얻어서 그녀와 이혼하고 (혹은 다자연애를 이야기하고) 올리버를 만났더라면, 일에 순서가 있다면 그런것이겠다. 하지만 때때로 그게 어려울 때가 있다. 필립은 죽어도 끝내 못 그럴 사람이었다. 그 멍청한 새끼는 자기가 자기 정체성을 인정하지 못해서 자기 부인을 외롭게 만들었고 그 부인이 남자를 데려올때까지도 외면하다가, 자기한테 진실을 인정하고 마주보라고 요구하는 사람을 강간하고 결국 그 모든 관계가 파탄난 다음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 한개를 품에 넣고 제발로 동성애 교정치료 센터에 들어간다니까. 거기서는 온갖 게이 포르노를 보여주고, 십 분간, 그리고 주사를 놓아 억지로 토하게 하고, 또 게이 포르노를 십 분간 보고, 또 토하고, 게이 포르노와 올리버의 사진을 동시에 보고, 또 토하고.
그럼 그렇게 "반듯하게" 시작할 수 없었다면 필립이 올리버를 만나지 말았어야했나?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면, 감히 말하는데 그 삶이 필립에게 좀더 비참한 것은 아닌가. 실비아에게도. 그냥 자기 자신의 바닥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용기가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비참해진다.

그러니까 필립이 어땠으면 좋았을까? 필립이 얼마만큼 괴로워하면 될까? 물론 올리버와 필립의 만남은 그들이 짊어져야 할 주홍글씨지만, 그 글씨에 어디까지 짓눌려야 할까? 영영 그래야한다는건 필립에게 너무 가혹하다.


하지만 필립을 너무 쉽게 용서해서도 안 돼. 이건 내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실비아는 필립을 용서할 수 있었지만 필립은 스스로를 (쉽게) 용서할 수 없었다. 마땅히 그래야 옳다. 나는 필립을 용서할 수 있지만 나 자신을 그렇게 쉽게 용서해서는 안 된다. 나는, 우리는 마땅히 그래야 옳다. 필립을 가엾어할 순 있지만 나에게 쉽게 면죄부를 주면 안 되지.

오빠는 "그럴 수 밖에 없는 것들이 있다"고 말해주었다.

오빠한테 어디까지 말했던가? 기억이 희미하다. 왜냐면 나도 이 시작이 너무 괴로웠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내 가장 깊은 곳에 묻어뒀으니까. 크리스마스 파티때 소피와 해원과 키스했어. 오빠도 그건 알고 있을거다. 그냥 그 날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어. 오빠가 어디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을까? 내가 어디까지 어떻게 말했나?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와서 그걸 따진다고 한들 무엇이 중요하겠어. 그런건 아주 사소한 문제일 뿐이다. 여기에 관해서는 장담할 수 있다. 그건 이제 사소한 문제야. 내가 그렇다는게 아니라, 오빠도 그럴거라는 얘기지. 그럴것이다. 4년간 삶을 섞은 사람이라면 그쯤은 말할 수 있다. 나는 오빠를 잘 안다. 우리는 그만큼 사랑했다.

변명을 하자면 나는 너무 절실했다. 다자연애의 화두를 꺼낸지는 오래 됐지만 오빠와의 논의엔 진척이 없었고, 그러니까 있긴 했는데 내 절실함에 비해서는 너무나 더뎠고, 그렇다고 오빠랑 헤어질수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나를 증명해야만했다. 그러니까 정말 미치겠는거야. 필립은 자기가 뭘 원하는지 알면서도 인정하지 못했지만 나는 그 반대였다. 어렴풋히 여기 뭔가가 있는것같은데, 내가 이걸 바라는것같은데, 그게 뭔지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렵고 내가 그걸 정말로 바라는지도 모르겠는거야. 나는 팬섹슈얼이라는 단어를 찾았고, 다자연애가 나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고, 그런데 그게 자꾸 생각에서만 머물러서, 나는 정말 그런 사람일까? 사실 아니면 어떡해? 이게 맞아? 아니야? 이게 나야? 정말 이거야? 누가 가르쳐주면 좋겠어. 그러나 가르쳐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러니 나는 내 삶에서 그걸 증명했어야 하는데, 아 나는 여자를 한 번도 좋아해본적 없는데 내가 바이인가? 한참 고민하다가 꿈에서 여자애가 나오고 나서야 - 이런 건 정말 아무 의미 없는 일인데도 - 그래, 맞아 난 바이인것같아, 하고 인정하게 된 것처럼 뭔가가 너무 필요했는데. 내가 내 정체성에 대해서 의심하기 시작한 때부터 나는 끊임없이 괴로웠고 당장이라도 그걸 선언하고 싶었다. 나는 오빠를 아주 사랑하지만, 미안해, 나를 죽일만큼 사랑할수는 없었어.

그리고 눈 앞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 좋았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나를 사랑해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 너무 좋았어. 그것에 비하면 다른 모든 것은 너무나 희미하고 사소한 문제가 됐고 그 순간 나는 내 가장 깊은곳에 닿을 수 있었다.
그 날이 나를 바꿔놓았고 그 순간을 가졌기 때문에 나는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언젠가 어디에선가 조금 다른 순서 다른 방식이었더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게 무슨 소용이 있어?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과 일이고, 이미 생겨버린 기억과 감정이다.

후회하지 않는다. 적어도 후회하지 않아야 한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래야만 한다.
나만의 규칙이 있다고 트위터에 썼었다. 이 날 이후로 그랬다. 어쩌다 섹스할 분위기가 됐을 때는 하기 전에 꼭 물어볼 것. '너 후회하지 않아?' 왜냐면 우리는 무엇이건 후회하지 않아야하고, 그러니까 후회할 짓이면 애초에 하지 말았어야지.


오빠는 이해할것이다. 왜냐면, 모양새는 달라도, 우리는 같은 것을 겪었으니까. 다른 점이 있다면 오빠는 그걸 나한테 제대로 말할만큼은 용감했다. 작년 이맘때쯤 오빠는 얘기했다. 사실 그건 다자연애가 아니었대. 오빠는 나랑 헤어졌다는식으로 이야기했고, 그래서 오빠의 여자친구는 우리의 연애나 논의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고, 그래서 그건 바람이었다고.
이 말을 듣는 순간 납득할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미웠어도 잠수이별은 너무하잖아, 적어도 그정도의 예의는 지켜야 하잖아, 하고 생각했었는데, 그랬다면 오빠가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는 것이 너무나 이해가 됐다. 그냥 그럴 수 있지. 그랬을만하지. 다자연애에 대해서 기껏 합의를 이뤄놓고도 상대방에게 결국 그 얘기를 하지 못했던것도 이해할 수 있었고 특히나 '바람'에 예민하게 반응했던 오빠에게 그게 어떤 무게였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절실했던 것처럼 오빠도 절실했을것이다. 무엇이건.

그냥 그럴 수 밖에 없던 일들이었다.

그러니 나는 오빠가 죄책감을 오래 가지고 있지 않기를 바랐다. 서로 한방씩 먹였으니까 비긴 거라고 칠까? 그런 기분은 아니다. 내가 먼저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나는 오빠를 납득했을거야. 하지만 내가 그랬기 때문에 오빠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던 것도 맞다. 여기에서 용서한다는 말이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감히 내가 어떤 부분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 어쨌든 우리 사이에도 원칙이 있었고, 내가 먼저 무엇을 어겼건과 상관 없이 오빠도 그것을 어겼으므로 - 나는 오빠를 용서한다. 실비아가 올리버에게 당신을 용서한다고 말하듯, 올리버가 필립에게 널 용서해, 하고 말하듯.

왜냐면 나는 오빠를 사랑하니까. 사랑했고 사랑한다. 그 앞에서는 많은 것들이 사소한 문제가 된다. 나는 최선을 다했고 그 과정을 지켜봤던 사람들이라면, 지응의 말을 빌려, "단원은 형과 최대한 이야기를 잘 하려고 정말 인생을 걸고 노력했고,"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다시 감히 말할 수 있다면 오빠 역시 그럴것이다. 오빠는 나를 사랑하고/했고, 내가 오빠를 사랑한다는/했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 내게 오빠가 괜찮은만큼 오빠도 내가 괜찮을 것이다.

실제로 오빠는 모두를 용서한다고 했다. 용서라고 했나? 오빠는 모두를 그리워한다. 정말로.


남은 것은 필립이 스스로를 용서하는 일 뿐이다.

나는 오빠를 쉽게 용서할 수 있지만 나 자신을 쉽게 용서해서는 안 된다. 오빠도, 나를 쉽게 용서했지만 - 우리의 그 모든 과정들이 결코 쉬웠던 건 아니지만 - 자기자신을 용서하기는 어려웠을/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결국엔 그래야만 한다.

"원칙"은 중요하다. 중요하지. 원칙을 어겼다는 것, 순서를 뒤집었다는 것이 나를 얼마나 괴롭게 만들었는지. 그것은 적어도 내가 지응을 계속 만나는 동안엔 내 가슴팍에 붙어있을 큼직한 주홍글씨다(우리가 헤어진다고해서 그게 없어질까? 안보이는 척 잊어버릴수는 있지만). 이 주홍글씨가 무거워서, 벅찬 순간이 지나고 우리는 침대에서 오들오들 떨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지응을 처음 만났을 때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어서 얼버무리곤 한다. 이 까슬함은 나를 오래 따라다닐것이다. 그것이 언젠가는 우리를 잡아먹을 것이라고 예감한 적 있다. 그 순간이 지금일까?

주홍글씨의 무게에 짓눌려 죽어간다면 우리는 만날 수 없다. 계속 만나려거든 어떤 방식으로든 스스로를 용서해야 한다. 둘 중 하나야. 마음 한구석에 황무지를 놓고서는 사랑할 수 없다.
이것이 내게 조금 더 쉬울 수 있는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가장 당사자기이 때문이겠지. 나는 오빠를 크게 배신했지만, 오빠와 오랜 시간을 만났고 오빠와 많이 사랑했다. 최대한의 노력을 들였다는 것만이 내 면죄부가 되어주겠지. 지응에게는 이럴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지응이 견뎌야 할 몫이다. 계속 사랑하려거든, 계속 살아가려거든.

올리버는 말한다. "실비아는 이해할거예요." 그러니 필립, 죄책감에 짓눌리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고, 당신 스스로의 진실함을 직면하라고. 이 말이 나에게도 큰 위안이 됐다. 그렇다고 올리버가 못된 사람은 아니야. 올리버는 적어도 어떤 지점에 있어서는 실비아에게 필립보다도 훨씬 좋은 친구였고, 진심으로 실비아를 사랑했다. 또 조금 뻔뻔하고 귀엽다. "배신, 내 안에 배신이 있어! 상처주고, 상처받은!" 그러면서도 필립을 놓고 바람을 또 엄청나게 피우고, 그래놓고 필립, 나 너 정말 사랑해. 이거 진심이고 이거 정말 사랑이야. 그러니까 나 버리지 마. 나 혼자 두지 마. 하고 애원할 줄도 안다.
물론 항상 모든 것들이 좋은 결론을 가질 수 있는 건 아니다. 때때로 함께 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기도 하다. 2017년의 세 사람은 즐거웠지만, 58년의 세 사람은 결국 서로를 떠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했으니까. 그럴 수도 있고, 그래도 괜찮을 것이다.


단원은 항상 애인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했다.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을 내어달라고 하고, 바닥을 들여다보게 만들고 그렇게 그들의 삶을 뒤흔들고, 때때로는 "인생을 걸고" 무언가를 선택하게 만들었다. 그 순간마다 나는 아주 열심이었고 진심이었다. 힘들어도 먼저 도망친 적 없다. 그래서 반대로 애인들이 나로부터 도망치게 됐지만.
새벽에 지응은 "여전히 나는 단원을 정말로 좋아하고, 우리 같이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도 드물 것이라고 생각해." 하고 썼다. 나는 이 마음에 기대 조심스레 이 일기를 썼다. 황무지를 놓고서는 사랑할 수 없어. 그러니 우리는 선택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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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의 습작 2017. 4. 6. 01:33

후회의 습작 21

- 2017년 4월 5일 수요일

        B는 최근 구여친과 연락이 닿았다. 어느정도 구여친이냐면, 그러니까 아마도 대학 들어와서 두 번째로 사귄 여자친구니까 12년쯤 만났었을까. 아니면 13년쯤. 오늘은 회기역에서 만나서 저녁을 먹었고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고 했다. 나는 안암에서의 저녁 약속을 너무 늦지 않게 끝내고 집으로 가려던 차였다. 버스를 기다리는데 B에게서 카톡이 왔다. '올래?'
 
       사실 나는 좀 신났다. 보통 나는 애인이 생기면 친한 친구에게, 술모임에, 학회나 단체 사람들에게 여기저기 많이 인사시키는 편이지만 B는 그러한 타입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B에게서 이야기를 자주 듣는 친한 친구들 몇 명을 만나보고 싶어서 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여러 번 졸랐지만 한 번도 성사된 적이 없었다. 그러던 B에게서... 친구 만나는 자리에 오겠냐는 이야기를 듣다니... ((감격)) 게다가! 그냥 친구도 아니고 구여친! 현애인의 구애인을 만나는 자리! (이유없이 신남) 
        현애인의 구애인 만나는 것은 한 번도 해 본 적 없어서... 너무 신나고...? 어떤 기분일지 잘 모르겠고... 구남친의 현여친을 만난 적은 있다. 어쩌다 수업 같이 듣고 (인생 첫 F 받은 타전공 수업) 말 트고 페친하고 친구되고... 앗 그분의 입장에선 내가 현남친의 구여친이었겠군! 여하간 그래서 너무 신났다 카페에서 만나자마자 휙 화장실 다녀올게요! 하면 너무 예의없어보일까봐 화장실부터 가고 립스틱도 고쳤는데 그랬는데 그런데 그 사이에 가셨다고... '말은 괜찮다고 해도 그분이(=내가) 불편하실 것 같다'고 서둘러 자리를 뜨셨다고 했다. 아니... 이런 것 불편해하지 않는... 진짜... 사실 좀 신났는데... 물어보고 싶은 거 넘 많았는데... 여하간 B를 통해 담번에는 셋이 뵈어요! 하고 잘 이야기 했다. 후후 정말로 그런 자리 있을 수 있었으면.


- 보편적으로는 이런 자리를 불편해 할 것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은데. 사실 이건 다자연애를 선언하기 전부터 그랬었다. 애인들의 전 연애 이야기는 늘 궁금하고, 그들이 불편해 하지 않는 선까지는 꼬치꼬치 캐묻고 재미있게 듣는다. 그들이 전 애인들을 만나러 가더라도 신경 쓰이거나 하지 않고... 하지만 정말로 만나더라도 불편하지 않을까? 그것은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 사실 불편할 것 같아서가 아니고, 막상 그런 자리가 있을 때 그것이 어떤 상황이 될지는 한 번도 겪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고 - 나는 애인의 친구를 만나서 인사하는 자리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만 - 그럴 때 내 마음에 불쑥 어떤 생각 어떤 기분이 끼어들지는 나 자신조차도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그러지 않을거라고 생각하지만, 감히 어떤 것도 장담할수는 없으니까. 
        그런 건 연기같은거야. 생각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머릿속으로 짐작하거나 계산하는 것은 결국 무용해진다. 직접 시도해 볼 때, 연기에 몸을 던질 때에야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고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들, 그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고 경험하는 것이야말로 좋은 연기라고. 연애, 관계, 공동체, 사람은 전부 다 그런 것들일 것이다.

- 그리고 이 연장선에서 어서 빨리 B에게 새로운 '연애'가 생겼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한다. 반대로 내게도, 굳이 연애라고 이름붙이지는 않아도 좋으니, 어쨌건 조금 더 비중있는 관계가 - 하지만 실제로 관계에서 연애와 연애가 아닌 것을 구분하는 것에 큰 의미가 없다면, 무엇을 '연애'로 명명하고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가? 그것도 알 수가 없다. 명명에는 힘이 있다. 이 고민은 그런 관계들을 구체적으로 맞닥뜨린 다음에야 조금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 생겼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한다. 로맨틱함과 에로틱함을 양쪽 다 충족시킬 수 있는 관계 말이야. 
        다자연애가 꼭 다수연애여야 한다는 법은 없다. 우리는 서로만을 애인으로 명명하지만, 우리의 연애는 충분히 다자연애이다. 하지만 이 단수의 연애가 다수의 연애가 될 때, 상대방에게 나만큼이나 비중을 차지하는 또 다른 사람이 생길 때, 우리의 마음에는 무엇이 생겨날까. 우리는 정말로 질투하지 않는 사람일까? 혹은 질투하는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일까? 그리고 그 관계들 가운데서 마음과 몸의 균형을 잘 맞출 수 있는 사람일까? 한 사람을 충분히 존중하며, 존중받지 못하는 기분이 들지 않도록 하고, 그러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그만큼의 마음을 쏟아줄 수 있는 사람일까? 어쩌면 그렇지 못 할 지도 몰라. 하지만 그럴 때, 우리의 불균형을 들여다보고 고민하고 인정하고 털어놓고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일까? 균형을 찾는 연습을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사람일까? 우리의 리듬을 맞출 수 있는 사람일까? 그러기 위해 어떠한 합의점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일까?
        나는 내가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고 싶다. 믿는다, 고 썼다가 정정한다.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므로. 다만 이것은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고 '요청'되는 것이다. 또다시 포-즈의 문제. 

- 그러므로 더 많은 실험들을 해보고 싶다. 내가, 우리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 다시, 연기와도 같은 것.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 교수님은 말버릇처럼 매번 물으셨다. 그러니 더 시도해보아야 한다고, 끝까지 밀어붙여보아야 한다고. 이제야 그런 말들이 내 몸 속 깊이 새겨져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막상 그것이 닥쳐 왔을 때 내가 무엇을 느낄지, 무엇을 볼지 무엇을 들을지 그리고 무엇을 말할지, 해보기 전에는 모르는 거야. 궁금하지 않아? 그것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나는 끔찍하게도 궁금해. 


- 솔직히 고백하는데 립스틱 다시 발랐던 것은 잘보이고 싶어서보다는 어쨌건 애인의 과거의 사람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였다. 일종의 견제. 인정합니다. 애인의 과거의 사람 만나는 것 자체는 전혀 아무렇지 않은데, 다만 구여친보다는 내가 더 예쁘고 싶고... 오늘의 차림새가 조금만 더 떨어졌더라면 선뜻 만나러 가겠다고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막상 만났는데 구여친이 나보다 훠얼씬 예쁜 사람이었으면 조금 슬퍼졌을 것이고 그만큼은 아니면 조금 기분좋아졌을거야. 그러니까 그 사람과 나를 비교했을 거라는 말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애인에게 누군가가 생긴다면, 연애대상으로서 그 상대방과 나를 반드시 비교하겠지. 그리고 그 좋지 못한 척도의 첫 번째는 외모가 될 것이고. 이것은 다자연애의 문제보다는 자존감의 문제이다. 그러니 좋은 다자연애를 말하려면 우선은 내 병들어버린 마음부터 도려내야 할텐데. 


- ​2017년 4월 2일

        예쁜 것들을 보면 입을 맞추고 싶더라 사랑스러운 것들도 그래 저지선 너머에 걸린 그림에 그리트의 눈빛에 테세우스의 발가락에 부서지는 아드리아 해안에 파리 길바닥의 지저분한 냄새에 인상파의 그림을 닮은 센 강의 야경에 솔직한 말을 하는 입술에 들뜨고 싶은 밤에는 술에 취해서 다정함에 기대서 그런 키스들은 에로틱한 것보다는 로맨틱한 것이지, 그러니 더 많은 사람들과. 굳이 애인으로 이름붙이지 않는, 애인만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나의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뺨을 감싸안고 귓가에 쪽 소리를 남기고 정확하게 입술에 입맞춤을 남기고
        손을 잡는 건 사랑한다는 고백이야
        경계를 흐리는 나의 세계에 다정으로 당신의 손을 잡고 

        모럴이 없다는 건 사실 자신만의 모럴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지 경계를 흐리려거든 이름을 지우려거든 더 정확히 말해야 하는거야, 그래서 파고들어 당신의 욕망하는 바를 묻는다 그것으로 기준을 세울거야, 나의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사람아 반대로 내게 묻는다면 우리 경계 없이 엉켜 다정해질까 
        언제부터인가는 살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조금쯤 미래를 기대하게 되었어 당신이 내 손을 잡아주었기에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들뜬 밤이 지나면 감각같은 확신이 돋는다 그것을 붙들면 살아갈 수 있다 

- 잠들기 직전, 넘치는 말들을 그러모아 쏟아냈던 것이라 자꾸만 불만이 생긴다. 원래는 더 많이 쓰고 싶었던 일기였는데, 이렇게 털어버리려던 생각이 아니었는데, 더 잘 쓸 수 있는데. 그래도 좋은 일기라는 평을 들었으니 조금 더 어울리는 곳에 기록해놓는다. 조만간 더 설명할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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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의 습작 2016. 12. 11. 18:47
후회의 습작 20

- 지금에 와서 되짚어보면, 지금을 구성하는 많은 것들은 지난 겨울 즈음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또 다시, 겨울이다. 
        후회의 습작의 첫 글에서 나는 <'후회의 습작'에는 이런 이야기들을 쓸 것이다. 결코 후회하지 않을 나의 순간들. 윤여우의 표현을 빌려 어둠, 입맞춤, 열기, 순간, 그런 것들. 새벽과 밤의 경계에서 담배를 몇 개피씩 태우면서 우리가 함께 느꼈던 어떤 몽롱한 마음. 몇몇 사람들이 읽어주었으면 하는 순간들이다.> 하고 썼다. 
        그로부터 약 일 년이 지났다. 커다란 지각변동이 있었고, 내 일상은 전혀 다른 패턴이 되었다. 마냥 좋았던 것만은 아니다. 설렘만큼의 조바심이 있었고, 눈물과 무기력, 가슴을 찢어내는 상처와 선연하게 남은 흉터가 있었다. 그러나 이 제목 아래 씌여진 순간들을 나는 단 한 순간도 후회해 본 적이 없다.
        앞으로 더 많은 이야기들을 쓸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란다. 그 이야기에 누가 등장하든, 어떤 결말을 맞든 나는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도 그러하기를.

- 이 카테고리의 비밀번호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이제는 비밀글로 잠그지 않고 쓸 수 있다.


- 2016년 12월 8일 금요일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서로를 좋아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모습을 볼 때, 질투 대신 느끼는 즐거운 마음을 compersion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읽은 적이 있다.


        내가 보는 앞에서 H와 B는 여러 번 키스했다. (두 사람 모두와 여러모로 이야기를 해 본 입장에서 보기에는,) B는 아주 예전부터 짊어지고 온 불평 - 혹은 불안 - 을 토로했고 H는 아주 예전부터 반복해 온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나는 아주 예전에 덮어두었던 ______ 을 다시 느꼈다. 질투도 불안도 아닌 이 마음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까.

        B는 나를 따로 가게 밖으로 불러내어 너 정말 괜찮아? 하고 여러 번 물어보았다. 그때마다 나는 누가 봐도 괜찮아보일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고 여러 번 말했다. H도 언니 정말 괜찮아요? 하고 내게 물었다. 나는 이 상황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왜 다들 내게 괜찮느냐고 묻지? 나는 다른 사람들과 키스할 때 B의 허락을 구하지 않는다. H도 다른 사람들과 키스할 때 내 허락을 구하지 않았다. 이 자리를 마련한 사람은 나고, (감히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가장 용감하게 관계의 방식을 제안하고 선언한 것도 나다. 그런데 왜 내게 괜찮느냐고 묻는걸까? 내가 괜찮지 않아 보였기 때문일까? 하지만 설령 내가 괜찮지 않더라도 그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H와 B의 관계는 두 사람의 선택의 문제이고, 내게는 거기에 개입할 권리가 없는걸. 나는 내 마음이 두 사람을 주저하게 만들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더더욱 괜찮다고 힘주어 말했다.

        하지만 나는 괜찮았을까? 나 자신에게 자꾸 물어보았다. 심리철학에서는 심성이란 스스로에게 투명하고 특권적이라고 배웠지만, 내 마음이 어떤지는 나 자신도 잘 모르겠는걸. 한참을 고민하고 들여다 보았는데, 어디에서도 내 마음이 괜찮다는 확신을 얻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괜찮다고 말하지 못한다는 것이 안 괜찮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말장난 같아 보이지만, P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 곧 ~P는 아닌걸. ~~P는 ~~P이지, ~~P가 곧 P인 것은 아닌 것처럼. 그렇다면 안 괜찮았는가? 안 괜찮을 이유도 없었다.
        정확히는, 괜찮아야 했다. 이것 역시 포-즈의 문제라고 나는 생각했으므로. 그래서, '후회하지 않는다'는, 정확히는 후회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정작 내 마음이 그 일을 후회하는지 후회하지 않는지 구분하지 못한 채 넘어가는 것처럼, '괜찮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 마음이 괜찮은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괜찮다. 괜찮다고 말했으므로 괜찮아야 했고, 괜찮아야 하므로 괜찮아야 했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것은 내 몫이다. H와 B의 사이와는 무관하다. 
        하지만 내 마음을 덮어놓지는 않을게. 안 괜찮다면 그렇다고 솔직히 이야기 할게. 그리고 왜 괜찮지 않은지, 무엇 때문인지, 어떻게 해야 괜찮아 질 수 있는지를 외면하지 않고 들여다보고, 적어도 이 공간에는, 최대한 예쁜 말로 듣기좋게 꾸미려고 하지 않고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느꼈는지를 솔직하게 쓸 것이다. 그것이 용감하고 솔직한 사람이 될 수 있는 방법일 것이고, 우리 모두가 오래 함께 단단해질 수 있는 방법일테니까. 


- 2016년 12월 9일 토요일

        정말이지 내 마음은 H와 B의 관계와는 무관하다. 하지만 내 마음에 대해서 설명하려면 나와 H의 관계, 나와 B의 관계를 생각해야 한다. 나와 H의 관계에 대해서는 지금은 쓰지 않을 것이다. H는 어떻게 생각할 지 모르겠지만, 나는 '몸이 마음을 따라잡는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슨 뜻이냐면, 우리는 친밀하지만 친근하지는 못한 관계라고 생각하므로. 좋아하는 만큼 가까이 지내지는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H는 늘 나를 아주아주 좋아한다고 말해주지만-... 지금보다 자주 보고 더 많이 듣고 더 사소한 것들을 공유하는 시간을 차근히 쌓고 나서야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확신 있는 말을 쓸 수 있다고 여긴다. 그 때가 빨리 왔으면 좋겠지만, 언젠가는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조급하지는 않아!

        그러니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나와 B의 관계 뿐이다. 

        아니, 말할 수 있을까?

        이 이야기는 B와 함께 하고 싶었다. 물론 B가 아주 무신경한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다른 언어를 쓴다. 그래서 쉽게 말하기 어려운걸. 이를테면, 지난 계절에 H와 B의 관계가 나를 슬프게 했던 이유는 B가 H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에 비춰 보았을 때 내가 B로부터 덜 존중받고 있다고 느꼈던 지점에 있다. B는 명확하게도 self-centered 된(/하는?) 사람이고, 그 부분에 있어서 B와 만나왔던 내내 (B와 다른 사람의 관계와 상관 없이) 부딪혀왔다. 그 과정에서 B는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하고 나는 "말하지 않고 기대하지 않고 실망하지 않는 법을 연습하려고 했(후회의습작14)"다. 하지만 B가 다른 사람을 그렇게 대하지 않는 모습을 볼 때면, 그렇게 애써 내려놓은 마음이 고개를 치켜들며 '왜 나는 그렇게 대해주지 않아?' 하고 말하는 것이다. 
        해린언니는 '모두를 똑같이 좋아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모두를 똑같은 모양으로 좋아할 수는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모두를 똑같이 존중하려고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문제는 B가 다른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건 관계 없이, 평소에도 나 스스로가 덜 존중받는다고 느끼는 마음과 불만족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그저 덮고 넘어갔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그 마음을 말하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다. B는 '말해주지 않으면 모른다'고 했지만, 우리는 이미 이 이야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어떤 부분은 바뀌었지만 여전히 어떤 부분은 그렇지 않다. 하지만 내가 이 이야기를 다시 꺼낸다고 해도 B는 같은 설명을 (혹은 변명을?) 반복할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B가 H와의 이야기를 언급했을 때, 나는 어차피 반복될 이야기를 굳이 꺼내지 않았다. 다만 "어떤 부분은 네가 노력해주었고, 어떤 부분은 내가 포기했다"고만 설명했다. B는 더 묻지 않았다. '포기'라는 단어가 나왔는데, 어째서 더 묻지 않을까? 물어봐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말들이 내 안에는 아주 많다.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하지만 얼굴을 맞대고 직접 말하는 것만이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늘 열심히 말하고 있는데, 읽히기를 기다리는 일기가 이렇게나 많은데.   

        S의 일기를 허락 없이 빌려왔다. 

이상형은 애초에 설정하는 데서 의미가 끝난다. 그래서 -에게 그로 인한 아쉬움이나 서운함을 느끼는 건 정말로, 전혀 아니다. 내가 서운함을 느끼는 지점은, 내가 참지 못하고 몇 번쯤 말해도 -는 여전히 내 일기를 읽지 않는 그대로일 거라는 것 같은 것들이다.

        '참지 못하고 몇 번쯤 말해도' 어차피 읽지 않는 사람은 읽지 않을 것이다. 몇 번쯤 말해도 소용이 없다면 더 이상 말하는 것을 포기하게 되고 만다. B는 늘 나를 위해 내 입맛에 맞춰 내가 좋아하는 것은 넣고 싫어하는 것을 뺀 맛있는 요리를 해 주지만, 아무리 맛있는 요리라고 해도 내 일기를 읽어주는 편이 더 좋은걸. 


        NX는 '연애 이야기를 주변에 잘 하지 않는다, 더더욱이나 애인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라면' 하고 말해서 나를 감탄하게 한 적 있다. 반대로 나는 애인에 대한 나의 불만사항을 정작 본인에게는 전달하지 못하면서 애인을 뺀 주변 사람들 모두에게 투덜거리는 타입이었다. 변명을 하자면, 나는 당사자에게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것을 힘들어 하기 때문에 애인에게 직접 뭔가를 말해서 바꾸기보다는 말을 뺀 행동들을 통해서 변화를 유도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이 노력이 발버둥이 될 때가 많지만-... 
        여하간, 그 말에 깊은 감명을 받아서 앞으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기 전에 본인에게 먼저 이야기하는 애인이 되겠다고 다짐했었던 적이 있다. 그래서 원래라면 썼을 법한 구구절절한 하소연들을 오늘은 생략하기로 한다. 그러니까 오늘은. 먼저 B에게 이야기를 꺼낼 용기가 없다면 남에게도 하면 안 되는 것이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매일같이 투덜댄다고 해도, 사랑받는 것을 모르지는 않는다.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까 더 열심히 말하려는 연습을 하는 수 밖엔. 


        하지만 다음의 연애는 꼭 일기를 꼬박꼬박 쓰고 챙겨읽는 사람이랑 하자고 다짐한다. 


- 2016년 12월 10일 일요일
 
        오늘은 못 했던 이야기를 하나 꺼냈다. 연습과 노력. 여행 생각을 했다.
        보고 있어도 보고싶은 사람들이 많다. 마음이 아플 만큼 보고싶어. 그래서 가족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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