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24일 일요일, 여행 24일차, 빈.
0. 벌써 24일이라니. 한 건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2015. 5. 34. 8:46 / @Aida)
1. 밤 열한 시 오십오 분, 프라하 플로렌스에서 출발한 버스는 새벽 네 시 사십분인가 즈음에 비엔나에 나를 내려놓았다.
2. 두 시 까진가, 버스의 와이파이를 즐기며 검색도 하고 오빠랑 통화도 하고(잘 안 됐지만) 하다 눈을 붙였다. 입을 벌리고 자는데 스튜어드가 나를 깨웠고 비엔나 공항이 아니라 시내로 가는거라면 여기서 내려야 한다고 했다. 탑승할 때 티켓을 꼼꼼하게 체크하는건 이래서였구나. 허둥지둥 버스에서 내렸고 내 캐리어는 이미 인도에 덩그러니 놓여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3. 그래도 다섯시는 넘어서 도착할 줄 알았는데... 버스 터미널도 아닌 거기는 컴컴하고 휑뎅그레하고 추웠다. 버스 저편에서 인기척이 들렸는데, 같은 버스를 탔던 (한국어를 들었다) 여자 두 사람이 나와 같은 정류장에서 내렸던 거였다. 두 사람은 프라하에서 자그레브로 가는 길이었고, 곧장 비엔나에서 유로라인 버스를 탄다고 했다. 유로라인 버스 탑승은 다른 곳이었기 때문에 셋이 나란히 역을 찾았다. 구글맵은 다섯 시나 여섯 시에야 있는 S반의 첫 차를 타고 또 25분이나 걸어야 하는 한 시간짜리 경로를 알려줬는데, 그냥 무작정 U반을 타기로 했다. 지하철은 다 연결되어 있으니까 대충 어떻게든 되겠지. 72시간 교통권을 샀고 새벽 네 시 오십 분에 펀칭을 했다.
4. 놀랍게도 U반은 운행중이었다(!) 시간표를 살펴보니 첫 차가 일찍 시작된게 아니라 막차가 안 끝난 것 같았다. 나이트라인 일수도 있고, 24시간 운행일수도 있고. 어쨌거나 다행이었고, 숙소까지 가는 내내 우리처럼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가는 여행자들과 아직도 술 마시던 파티나잇 무드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남자들을 여럿 마주쳤다(우릴 보고 슐디궁, 하고 우리가 별다른 대답을 않자 쏘리, 쏘리, 쏘리를 반복했다. 그리고 나서는 곤니치와, 곤니치와, 곤니치와, 라고).
5. 분명히 숙소 주소를 오프라인으로 저장해뒀던 것 같은데. 구글맵은 검색이 안 됐고, 심지어는 내 위치를 프라하 한 가운데로 찍어주었다. 얘 넌 아직도 프라하에 있으면 어떡하니?...
6. 캡처해 둔 지도를 보고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U반 역을 찾았다. 로이먼플라츠. 잘 모르겠지만 노선이 빨간색이니까 U1이겠지. 일단 가장 가까운 역인 스타디온에서 U2를 타고, 무조건 U1 환승역에서 내려서 갈아탈 계획이었다. 이리저리 수소문해서 노선도를 찾아봤는데 심지어는 유효했다고 한다. 하하! 지하철 만세! 로이먼플라츠는 1호선 맨 끝 종점역이었다.
7. 스물 한 살쯤 되어보인다고 내심 생각했던 두 여자는 서른살이었다. 중학교때부터 친구였대. 회사를 끄만 두고 50일짜리 여행을 하는 중이랬다.
8. 비엔나의 대중교통 시스템은 독일의 것과 비슷하다는 이야길 들었었다. 오스트리아는 무슨 언어를 쓰지? 오스트리아 어? ......독일어? 독일어를 쓴다는 생각에 반가워졌다. 슐디궁, 하고 말을 붙인 뒤 데...데꾸이? 하는 대신 당케 쉔! 할 수 있다는 점에 편안함을 느꼈다.
9. 세상에, 독일어가 반갑고 편안해지다니!
10. 가방을 질질 끌고 환승역에 도착했다. 바닥엔 나뒹구는 쓰레기와 담배꽁초와 함께 누군가 물컹 미끄러지게 밟고 바닥에 신발을 질질 끌어 닦은 흔적이 남은 질펀한 덩어리(...)가 있었다. 진흙이라고 보기엔 좀... 어... 대체 왜 지하철 돌바닥 한 가운데에 저런게...?
11. 환승역의 양갈래 길에서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 지 몰라 지도와 역 이름을 맞춰보며 쩔쩔 매다가 주변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가게 문을 열고 물건을 들여놓던 아저씨는 '슐디궁, 우 아인츠, 로이만플라츠' 라는 몇 개의 단어조합만으로도 훌륭하게 나의 곤란을 알아봐주었고, 그냥 방향만 알려주면 될텐데도! 가게 문을 닫아걸고 따라오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양갈래 중 오른쪽 길로 쭉쭉 걸어들어가 코너를 돌자 '로이만플라츠(행)' 하고 씌여진 엘리베이터가 있었는데, 거기까지 다다라서야 이걸 타고 내려가면 된다고 말해주고 돌아갔다. 몇번이나 당케, 당케 하고 외쳤다.
12. 로이만플라츠에 도착했을 땐 이미 하늘이 파르스름하게 밝아온 후였다. 역은 작은 공원같은 나무덤불로 둘러싸인 곳에 있었다. 풀꽃냄새가 났고, 새들이 극성맞게 날아다니며 쪼로로롱 지저귀었다. 자기들이 신데렐라 캐스트라도 되는 줄 아는가봐.
13. 안 되는 구글맵을 붙들고 주변 거리 이름을 맞춰보려고 애를 쓰고 있었는데, 길 건너편에 선 두 남자가 이쪽을 보고 뭐라뭐라고 외쳤다. 여행중엔 조금 날이 서 있는 편이라 일단 경계부터 하고 봤는데, 헬로? 헬로? 하는게 날 보고 말을 거는 것 같아서 길이나 물어보자 하고 가방을 질질 끌며 걸어갔다. 가까이 가자 그가 아까부터 반복했던 말이 명확하게 들렸다. "호스텔? 호스텔?" 지도를 보여주기도 전에! "이쪽으로 300미터!" "어떻게 알았어요? "We know, we know." 어쩌면 I know, I know 였는지도 몰라. 그들은 길가에 택시를 세워두고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기사였다. 목소리 높여 당케, 당케! 하고 씩씩하게 걸어갔다. 아, 상냥해.
14. 결과적으로는 틀린 길이었다. 그 길로 쭉 가는게 아니라 첫번째 블록에서 왼쪽으로 꺾어서 쭉 갔어야했어... 돌덩이같은 가방을 질질 끌며 걷다가 거리 이름과 지도를 맞춰봤는데 아무래도 이상했다. 세로로 놓여있어야 할 길이 가로로 놓여있었어. 한두어 블록을 더 가고 나서야 내가 엉뚱한 방향 - 반대도 아니고 - 으로 가고 있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왔던 길을 되짚어 가고, 아마도 맞는 방향일 것으로 추측되는 쪽으로 길을 꺾어서 한참 걸었다. 길은 지저분했다. 게다가 언덕길이었다. 빗물 웅덩이와 함께 담배꽁초, 쓰레기, 그리고 똥(이번엔 명확하게도 사람의 것이 아니어보였으므로 안심했다)들을 피해 캐리어를 끌면서 또다시 인생의 무게에 대해 생각했다. 분명히 10킬로그램을 부쳤는데도 왜 이렇게 무겁지. 늘어난 건 하나도 없는데. 새벽 공기는 차갑게 가디건 안쪽을 파고들었다. 길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택시만 몇 대 쌩쌩 달려갔다. 그래도 호스텔이 안 나와서 두리번두리번 헤매고 있는데, 지나가던 택시 한 대가 멈춰섰다. 보조석 창문이 열렸고 (왜 영업중인 택시 보조석에 앉은 사람이 손님이 아니라 친구사이로 보이는거지) 남자가 날 보고 뭐라뭐라고 했다. 어드레스? 어드레스? 어딜 가냐는 것 같아서 냉큼 아이패드를 보여줬고, 남자는 말로 설명하려다 영어가 짧자 택시에서 내려서 저 앞에서 꺾으라며 길을 알려줬다. 또다시 당케 쉔, 당케 쉔!
15. 아, 정말로 세상은 친절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어쩌면 독일어를 쓰는 사람들은 다 친절한 걸지도 몰라.
16. 힘들게 호스텔에 도착했다. 아마도- 여섯시나 그 쯤 되었을거야. 24시간 리셉션엔 수염을 기른 남자가 있었다. 체크인은 오후 두 시 이후이므로 일단 캐리어를 맡겼다. "어, 괜찮으면-" "소파에 앉아서 와이파이 좀 써도 되냐고요? 물론이죠." "아뇨, 숙박비 계산 지금 미리 할 수 있냐고요." 친절한 사람이었다. 나한테 와이파이 비밀번호가 적힌 종이를 줬고, 가방을 보관해두고 돌아와서 다시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줬으며, 지도를 줘놓곤 또다시 설명해준다고 새 지도를 꺼내줬다. 이따 체크인이 편하라고 작성해야 할 종이를 미리 작성했고, 6인실 도미토리 중 여성전용이 있는데 그쪽으로 배정해줄까 하고 물어봐주기까지 했다. 아주 짧은 망설임(내가 너무 사람을 가리는 건 아닐까, 이게 일종의 차별(혹은 남성혐오)은 아닐까, 어떤 가능성을 저버리는 것은 아닐까)끝에 여성전용 도미토리로 방을 바꿨다. 또다시 저녁에 커튼을 걷었는데 허리에 수건만 두른 남자와 마주치고 싶지 않아...... 속옷 빨래를 편하게 말려두고 싶어...... 너 일본에서- 어, 캐나다? (주소를 적을 땐 주로 밴쿠버 주소를 적는다. 왜냐면 그게 간단하니까) 진짜로는 어디서 태어났어? 하면서 몇 가지 이야기를 했고, 가볍고 유쾌한 수다를 - 캐나다는 정말 추워? 우리 가족은 진짜 곰이 시내 한복판을 돌아다니는 걸 본 적이 있대 - 떨었다. 비엔나에 왔는데 뭘 볼지 모르겠다면? 하면서 지도를 꺼내 박물관들은 여기에 밀집해 있고, 여기엔 재래시장이 있고 - 이름을 적어줄게 - 쇼핑하고 싶다면 여기, 또 쇤부른 동물원을 추천해.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동물원이거든! 하고 여기저기 동그라미를 쳐 줬다. 자그레브로 가는 교통편에 대해 이야기하자 컴퓨터에 앉아서 금세 검색을 해줬는데, 보통은 프라하나 부다페스트로 간다는 말에 '나 프라하에서 왔는데!' 했고, 어땠어? 음... 난... 별로였어. 뭐? 프라하가 별로 좋지 않았다고? 그거 참 놀라운데? 그리고 몇 명의 동료들이 들어오는 바람에 대화는 끝났다. 프라하가 좋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17. 소파에 앉아서 와이파이를 연결하고 오빠와 통화를 했다. 아침은 재래시장에서 먹을까, 했지만 일요일이라서 오늘은 열질 않는대. 오늘의 계획 : 1) 아침을 먹는다 2) 레오폴드 미술관을 간다 3) 장을 본다 4) 숙소에서 밀린 빨래를 하고 샤워를 하고 잔다. 그러나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잠을 못 잤으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소파에 앉아있으니까 아찔아찔 몽롱해졌다. 오빠가 토닥토닥 해주고 싶다는 말에 토닥토닥 말고 재워줘... 했다. 오빠는 지금 스피커폰으로 통화하면서 팔에 핸드폰을 얹어놨으니까, 나를 팔베개 해주는거랬다. 귀여워! 적어놨다가 내 소설이나 드라마에 써먹어야지(라고 생각하고 잊어버린게 참 많다). ...그리고 생각했는데 이거 예전에 내가 했던거 아냐?
18. 한시간 반의 통화 끝에 여덟 시 쯤 숙소를 나왔다. 공기가 여전히 쌀쌀해서 어깨를 옹송그렸다. 그래도 길가에 하나 둘씩 아침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숙소에서 역까지는 꽤 멀었고, 나는 춥고 배고팠고 피곤했고, 몽롱한 눈으로 아무 버스나 잡아타고 아무데서나 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따뜻하게 앉아있을 순 있겠지. 그리고 왜 안되지? 라고 생각했다가 포기했다. 춥고 배고팠고 피곤했기 때문이었다. 밥... 밥을 먹을거야.... 커피를 마셔야겠어...... 적어도 번화가쪽으로 나가면 아침 메뉴를 하는 식당을 만날 확률이 더 높아지겠지. 고작 세 정거장을 가면서 지하철에 앉아서 잠깐 정신을 놓고 휘청 졸았다.
19. 목적지인 뮤지엄쿼터(박물관 밀집지역)역을 가려면 칼스플랏츠 역에서 갈아타서 한 정거장. 갈아타기 귀찮았으므로 그냥 칼스플랏츠에서 내렸다. 조금 번화가니까 뭐라고 있겠지, 했는데 웬걸, 하나도 없었다. 넓은 도로엔 차들조차도 드물게 다녔고 간간히 부지런한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20. 런던에서 여행을 시작하면서 나쁜 버릇: 유럽에서 나는 아주 당당하게 무단횡단을 하고 다니는데, 그게 '무단'횡단이라는 생각조차 안 들어...
21. 간신히 아침 영업을 하는 카페를 찾았다. 온통 핑크색이었다. 그러나 내가 먹고싶은 건 카페가 아니라 레스토랑 메뉴였다. 계란! 계란이 먹고싶다! 오믈렛이나 스크램블드 에그가 있는 전형적인 북미식 아침식사! 그래서 그 동네를 한바퀴 뒤지고 다녔지만 열고있는 카페는 너무 비쌌거나(카페 뮤지엄), 영업시간이 열 시 부터거나(카페 비스트로), 스타벅스 뿐이었다. 결국 포기하고 처음 찾았던 핑크핑크한 카페로 돌아왔다.
22. 걷고있을 땐 괜찮았지만 앉으면 바로 쓰러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직도 커피는 잘 안 마신다. 난 카페인을 마시면 배탈이 나거나 심장이 쾅쾅 날뛰는 사회부적응자가 돼... 그래도 이럴 땐 커피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오스트리아식 에스프레소인 '아인스파네' 뭐시긴가 하는거, 에스프레소 위에 휘핑크림을 잔뜩 얹은 그걸 먹어보려고 했다가 '비에네 에이스카페' 를 시켰다. 에스프레소 - ??? - 바닐라 아이스크림 - 휘핑크림. 아인스파네와 비슷하지만 아이스크림과 아마도 우유가 들어가니까 덜 쓸 것 같았고, 게다가 비엔나 스타일이잖아. 근데 비에네 아인스파네Einspänner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에이스카페Eiskaffee였네? 그럼 아이스커피인걸까. 휘핑크림(느끼하고 맛잇었다)이 반절 넘게 올라간 커피가 나왔다. 커피를 마시고 크림을 떠먹어야 할지 섞어먹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잔을 한껏 기울였는데도 크림만 베어물었다. 크림층이 너무 두꺼워서 에스프레소가 흐르지 않았다. 이리저리 잔을 기울이고 혼자 잔망을 떨어보다가, 남자친구가 있었다면 귀여워해주었겠지만 볼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그만뒀다. 스푼으로 한쪽을 파내 에스프레소를 마셨는데 생각만큼 쓰지 않았다(아마 뭔가 섞였나봐). 홀짝홀짝 마시다가 생크림이랑 완전 뒤섞어버리고 나서야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생각났다. 떠먹고 싶었는데 완전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23. 샌드위치같은걸 먹고싶었는데 온통 케이크나 타르트 아니면 크로아상과 패스트리 뿐이었다. 노란 계란 노른자 두 알이 올라간 패스트리를 골랐다. 커피와 함께 5.몇유로, 계란이 두 개나 올라간 패스트리 하나에 2유로라니 각오한 만큼 비싸진 않았어! 계란이 탱글탱글하지 않고 약간 졸아붙은? 굳은? 모양새라 어떻게 요리했는지 궁금했어. 한 입 먹었는데 달콤해서 당황했다. 그리고 노른자를 베어물었는데... 달았어... 노른자가 아니라 살구를 졸인 거였다.
24. 배신당했어. 난 동물성이 먹고싶었단 말이야.
25. (10:03) 한시간 반 정도 죽치고 앉아 일기를 쓴다. 거리는 조금 더 밝아졌고 활기를 띤다. 차들이 많아졌고 사람들이 늘어났어. 카페에도 손님들이 늘어났다. 처음에 내 양 옆에는 할아버지 두 분이 커피를 놓고 앉아서 신문을 뒤적이고 있었다. 오른쪽 할아버지는 카페 사장님(?)인지, 손님들이 남긴 빈 그릇을 치워주더니 퇴근하셨다고. 의도하지 않게 카페를 관찰(?) 하게 됐다. 관광객으로 보이는 그룹들도 두엇 와서 빠르게 아침을 먹고 가곤 했다. 혼자 온 할아버지들이 많았는데, 대개는 에스프레소 잔으로 커피를 마시며 앉아있다. 북미식 아침이 계란과 토스트라면 유럽식 아침은 커피와 크루아상인가봐(녜니의 친구에 따르면, '아침엔 카푸치노!'). 정말 커피만 마시러 왔는지, 카운터에 서서 잔을 쭉쭉 비우곤 나간 남자도 있었다.
26. 누군가들의 아침을 관찰하는 것이 이렇게 재미있는 일일 줄은 몰랐어(저녁을 관찰하는 것보다도 더!). 무작정 밖에 나가 아무데나 앉아있어보라는 오빠의 말이 유효했다. 실은 내가 잘 할 법한 일인데도 부지런하지 못해서 하지 못하는 일.
27. 비엔나에서 보고 싶은 건 딱 세가지, 레오폴드 미술관, 벨베데레, 미술사 박물관. 레오폴드엔 약간의 클림트와 에곤 쉴레가, 미술사 박물관엔 벨라스케스의 왕녀가, 벨베데레엔 클림트의 키스와 유디트가 있다. 역순으로 기대하고 있다. 벨베데레는 첫 날 가는게 좋을까, 고민하다가 무거운 가방도 풀어놓고 예쁜 옷을 입고 깨끗하게 씻은 상쾌한 모습으로 보러 가고 싶어서 하루 아껴두었다.
28. 머리가 조금 굵어진 뒤 본 첫 전시회는 예술의 전당에서 했던 클림트전이었다. 그게 열-일곱살때였을까? 여섯살? 처음으로 내 스스로 보고싶다고 생각해서 보러 갔던 전시회였고, 그걸 기점으로 전시회를 보는 재미를 알았다. 류와 함께였다.
황금빛이 흘러넘치는 클림트를 기대했지만, 전시회엔 클림트의 후기 작품들이 많지 않았고 대부분은 스크린으로 대체했다. 그래도 두 점의 유디트는 좋았어. 나는 미술엔 별로 관심이 없는 편이었고 미술책에 실린 명화들엔 감흥이 없었으므로, 흔히 명작이라고 불리는 그림을 내 맨 눈으로 마주하면 이렇게 강렬한 충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경험이었다. 그것을 '아우라'라고 부른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았지만, 미술 작품들의 어떤 물질성- 지금은 마땅히 마음에 드는 표현이 없어서 투박하게 쓰여지는데, 하여튼 미술 작품들을 대면했을 때에만 느낄 수 있는 어떤 강렬한 존재가 거기에 있음을 어렴풋히나마 알게 됐다.
29. 그리고 클림트의 키스가 보고싶었다. 그의 황금빛 그림들이 궁금했다. 오스트리아의 박물관으로 간다면 그것들을 볼 수 있을까, 언젠가는 직접 그 작품들을 '보고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처음으로 무엇을 '보고싶어'졌던 일이었다.
(2015. 5. 24. 12:01 / @Leofold Museum)
30. 외국 박물관들의 좋은 점 몇가지. a) 작품과의 거리가 가깝다. 대체로 저지선을 놓지 않아서 코앞에서 작품을 들여다 볼 수 있다. b) 곳곳에 의자가 있다. 필요하면 스툴을 가져다 쓸 수도 있다. 작품 앞에 앉아 쉬는 것도, 일기를 쓰는 것도 가능하다니! c) 예외가 있지만 대개는 플래시 없이 촬영이 가능하다.
31. 열한시 쯤 들어왔던것같은데, DVD 상영하는 곳에서 벽에 기대 신나게 졸다 깨다 졸다 깨다 (두 번을 보고야 말았다) 나왔더니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핸드백이 돌덩이같이 무겁다. 다이어리, 아이패드, 물병, 필통, 수첩 두 권, 빵빵한 파우치에 헤드폰이랑 충전기랑 기타등등밖에 안 들었는데.
32. 윰은 클림트를 보러 왔다가 '에곤 쉴레에게 뺨을 맞았다'고 표현했다.
33. 더 많이 알게되는 만큼 보인다. 단순히 배경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작가들이 어떤 풍경, 어떤 동작과 표정, 어떤 감정을 그리고자 했는지, 이제는 알겠어. 어쩌면 이건 내가 아는 만큼만 아는대로 받아들이려는 것일 수도 있다. 종종 거리에서 들리는 독일어를 놓고 '나 저거 한국어로 들려!'하고 능청을 떨 때면 순웅이는 '사람들은 원래 자기가 아는 음운으로 소리를 들어'라고 언어학도다운 대답을 내놓곤 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오감에 투영되는 감각의 다발 (이건 칸트의 용어였다- 인식론때 김창래 교수님이 뭐라고 하셨더라) 을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들로 분절하고 인식하는 (뭐라고 하셨더라, 적확한 용어가 기억이 안 나) 과정인거지.
34. 운동을 하며, 혹은 다이어트를 하며 내 몸에 관심을 아주 많이 기울인 덕분에 나는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뼈와 근육과 그것들의 움직임에 대해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과거엔 그게 왜 중요한지 알지 못했었는데, 알고 나니 과거 예술가들이 왜 해부학을 공부했는지 (그리고 지금의 그림러들이 왜 인체 연습을 하는지) 알게 됐다. 존잘들은 다 존잘들이었어... 특히 대리석 조각들의, 풍만하고 옴폭 패이고 매끄럽고 때론 부드러워보이는 근육들을 볼 때. 에곤 쉴레의 누드는, 취향이 아니라 아름답다곤 말하지 못하겠지만 대단히 대단하다고는 말할 수 있다. 어두운 바탕에 얼룩덜룩 거칠게 문대놓은 색깔들이 어떻게 뼈와 근육의 덩어리와 흐름을 표현하는지에 감탄한다.
35. 어느 순간부터 작품들을 볼 때면 자연스럽게 그것이 묘사하고자 했던 원본을 상상하게 되었다(그만큼의 레퍼런스를 가지게 되었으니까). 예를 들면 초상화들을 볼 때 '실제로 어떻게 생긴' 사람을 이렇게 그렸을까, 하고 떠올리게 되는거 말야.
에곤 쉴레가 그린 여자의 몸들을 보면 자연스럽게 내 몸을 떠올리게 된다. 내가 '잘 아는' 여자의 몸은 그것밖에 없으니까(특히나 그 그림들의 몸이 여느 연예인들처럼 가늘고 늘씬한 대신 접히는 뱃살과 팔다리에 울퉁불퉁 붙은 지방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친숙!). 두 팔을 가지런히 늘어뜨리고 약간 긴장한 듯 정면을 바라보는 소녀의 몸에서 나는 샤워 후에 마주하는 내 맨몸을 떠올리고(Mädchen/Girl, 1917), 활짝 벌린 여자의 다리 사이에서 내 허벅지 안쪽의 부드러운 살덩이를 떠올린다(>Liegende Frau</Reclining woman, 1917). 그래서 에곤 쉴레의 누드 앞에 서면 어쩐지 발가벗은 기분이라 부끄러워져.
36. 생각해보면 다른 누드화들에서는 이런 기분을 못 받았는데. 그것들은 대개 부드럽고 풍만한 신화 속의 몸이었기 때문일까, 에곤 쉴레의 작품이 비교적 최근 - 백년도 안 된 작품들이라니! - 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냥 에곤 쉴레의 작품이 그런걸까?
37. 아이패드며 핸드폰이 상태가 안 좋아서, 배터리가 쑥쑥 떨어진다. 지금 쓰지 않으면 잊어버릴 것 같은 감상들이 있다. 급하게 적느라 적확한 표현을 놓치게 되는데, 다듬고 앉아있을 시간이 없어서 다급하게 우겨넣게 돼. (욱여넣게?)
38. 에곤 쉴레가 그린 그림의 남자들은 모두 다 비슷하게 생겼는데, 모두 자기 자화상의 얼굴을 닮았고, 자기 자화상은 자기 얼굴이랑 상당히 닮았다.
39. 에곤 쉴레는 별로 안 좋아하니까- 하고 가이드를 사지 않은 것을, 눈먼 엄마의 그림 앞에서 후회했다.
40. 에곤 쉴레는 특히 인체에 능하(ㄴ것같)다. 사람의 몸을 조각조각 내어 투박하고 건조하게 재조립한다. 특히나 어두운 색감들. 내가 에곤 쉴레의 그림을 왜 별로 좋아하지 않는지 어렴풋히 설명할 수 있을것같았다. 그의 인물들은 잘 마른 장작처럼 퍼석하게 비틀어져있어. 인간의 몸이 입은 온갖 부드러움과 아름다움과 풍요를 걷어버린 채 마치 뼈다귀만 남은 것 같은 강렬함, 보다 고전적인 교훈으로 표현하면 결국은 시간이 앗아갈 한때의 겉껍질을 벗어버리고 죽음 앞에 하잘것없는 존재로 선 인간의 모습.
41. 어떤 것들은. 그래서 참 별로야... 저 의도적인 초록색과 파란색. 물론 안 그런 작품들도 있고. 개인적으론 무하도 그렇고 에곤 쉴레도 그렇고 현대의 일러스트레이터를 보는 것 같다.
42. 그러나 존잘은 존잘이다.
43. 에곤 쉴레라는 인물 자체엔 관심이 없어서, 관련된 사진자료나 편지같은건 휙휙 넘어간다. Wally도 마찬가지야. 그녀를 아주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녀가 살았던 곳, 등본, 사진, 편지, 그녀가 후에 종군간호사가 되었으므로 종군간호사의 삶에 대해-가 왜 필요하지?
44. 다리 사이에 손을 갖다댄 여성의 스케치 제목을 보고야 reclining이 마스터베이션의 우아한 표현인가, 했다.
ㅡ
where I want to go
you never should loved me the way you did, 노란 네온
얼굴을 흩뜨린 스티치
파란 과슈, 누드 크로키, 나를 움직이는건 나예요. 나를 말해요.
마스터베이션하는 여자, Those who suffer love
I love solitude.... More solitude. 흰 네온
웅크린 팔, 여우, you have no idea how safe you make me feel, 대문자.
엎드린 여자, 기어오는 방울뱀, without him she had no mirror, 대문자.
순록, 엎드려 매달리고, i whister to my past do i have another choice, 대문자.
누워있는, 얼굴과 팔과 뒤섞여 형체를 알 수 없는, there is nothing left but you
돼지에 올라타 머리를 쏟아지듯 늘어뜨린 사람,
미루어 짐작하는 제목, i tried this just the once
loney chair drawing
(2015. 5. 24. 17:07 / @Cafe Bistro)
레오폴드를 다 돌아봤을 땐 네시가 조금 더 됐던 것 같다. 다섯시간을 있었지만 그 중 한 시간은 졸다 멍하니 앉아있다를 반복했을걸. 취미를 박물관에서 넋놓고 앉아있기로 바꿔야겠다. 일단 나와서 아무렇게나 걸었다. 뮤제움카르트를 나오면 바로 양 옆에 쌍둥이 궁, 한쪽은 자연사 박물관이고 한 쪽은 미술사 박물관. 독일어에서 자연의 반대말은 인간이 만든 것- 쿤스트, 예술인거래. 그래서 쌍둥이 궁에 나란히 놓은걸까. 두 박물관 사이를 쭉 걸으면 하우프부르크? 왕궁. Haup는 높은, 중앙, 이런거 비슷한 뜻인거같은데 하우프가 붙으면 무조건 좋은건가봐. 독일어 꿈나무!
문을 통과하면 커다란 광장이 있었는데 말똥 냄새가 무지무지 났다. 빙 둘러서 과거엔 궁전이었지만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이는 것 같은 건물들. 양쪽으로 선 기마동상. 왼쪽 잔디밭에선 커다란 그물로 비눗방울을 불고 있었고 아이들이 모여 까르르르 웃고 있었다. 지나쳐서 왼쪽으로는 아주 예쁜 꽃 정원. 날씨가 맑았더라면 완벽했을텐데, 정말로 동유럽 날씨는 날 안 도와줬다. 하늘이 '구름으로 꼼꼼하게 덮여있었다'.
걷다 보니 지금도 공연이 있는 것 같은 커다란 건물,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찍고. 건너편엔 공사중인 커다란 궁,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찍고. 그러고 71번 트램에 탔다. 어딜 가는거냐고? 몰라! 어쨌건 '링 거리'라고 불리는 (짐작) 걸 보니 빙글빙글 돌 거 아냐? 교통권이 있으니까! 트램의 의자는 초등학교 걸상처럼 나무로 되어있었다. 트램에 타고 나서야 지도를 살펴봤다. 71번은 반원을 그리며 링 거리를 돌다 무슨 플라츠 - 내가 내렸던 역 - 에서 외곽쪽으로 빠져나간다. 그래서 창 밖을 잘 살펴보다 아침에 걸어왔던 그 거리를 발견하고 냉큼 뛰어내렸다. 아무 트램이나 타고 아무데서나 내려서 아무 가게에나 들어가서 저녁을 먹겠다는 계획은 취소. 춥고 배가고팠고, 여긴 시내라 의외로 먹을게 없는 동네란말이야...
아침에 노렸다가 실패했던 Cafe Bistro. 큰길 바로 곁에 위치하고 있었다. 혼자 들어가자 영어 메뉴판을 가져다 주었다. 이제 주문정도는 할 줄 알아! 비테, 하고 부른 뒤 아인 슈니첼 비테, 당케! 하면 된다. 고민하다가 비엔나식 슈니첼을 닭고기로 골라봤다. 감자랑 샐러드랑 세트. 맥주는 추천받아서 더 단 걸로 했다. 물 사마시기 아까우니까 자꾸 맥주를 마시게 돼... 이젠 맥주가 썩 나쁘지 않다.
아침엔 빈 속에 커피, 오후엔 빈 속에 맥주, 이따 밤엔 일찍 자려고 40도짜리 술 한잔. 속에 좋지 않은 것들 뿐이네.
맥주가 먼저 서빙됐고, 뒤이어 닭고기 슈니첼이 나왔다. 접시에 토막낸 감자, 위에 소스 없이 달랑 올라간 고깃덩어리, 한쪽인 레몬 한 조각. 어... 꼭.... 치킨너겟 맛인데? 물론 슈니첼은 고기가 부들부들해서 좋다지만, 어... 그렇습니다 관광객용 식당을 잘못 찾은건지 닭고기가 문제였던건지 비엔나식이 문제였던건지 모르겠지만, 슈니첼은 독일에서만 먹는걸로. 벌써 다시 먹고싶다... 홀란드 소스랑 예거 소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리고 발사믹 드레싱에 얇은 토마토 두 쪽만 달랑 올라간거라도 샐러드가 너무 반가웠다. 야채라곤 양배추밖에 못 먹고 있었단말야. 들어가는 길엔 마트에서 과일 한 팩이랑 요거트랑 사가면 완벽할텐데, 일요일이라 마트 닫았겠지. 그리고 신나게 먹다가 깨달았어. 이거... 상추잖아? 적상추? 뜨든... 상추 샐러드라니... 왠지... 이상하고... 정겹고... 삼겹살 먹고싶다...
혼자 먹는 저녁(많지는 않았지만)들 중 처음으로 레스토랑에 앉아서 먹는 정갈한 음식이었다. 혼자 먹는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것도 깨달았다. 밥을 앞에 두고 아이패드를 두들기는건 바쁜척하려는게 아니라 오늘은 꼭 일기를 마무리짓고 자겠다는 마음 때문입니다... 체코에 있다 오스트리아로 건너왔더니 한 끼에 2만원 가까이 나올 밥값이 아까워졌지만, 그 정도는 괜찮다고 해주자. 오늘 힘들고 피곤했잖아. 먹지 않으면 쓰러져서 못 일어날 것 같았어...
오늘은 일찍, 여덟시쯤, 늦어도 열시엔 잘 거야. 내일은 새벽 네 시 반에 일어나야지.
유쾌한 웨이터 (조금씩 온갖 언어를 구사했다. 도피오, 도피오!) 가 식탁에 꺼내놓은 피포를 보고 He or She? 하고 물어봤다. She, Queen! 하고 대답하자 Hungry, Hungry! 하면서 내 접시를 향해 쩝쩝쩝 입맛 다시는 소리. 옆 테이블에서 노트북을 두들기던 할아버지까지 허허 웃었다.
내일 새벽 네 시 반에 일어나야 하는 이유는, 재래시장의 아침을 보고싶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아침이 궁금해졌다. 여섯 시부터 시작된다니까 그 전에 갈 수 있으면 좋겠다. 여섯 시에 열리는 시장의 아침을 구경하고 아침을 먹고(조식이 없으니까), 열 시 오픈에 맞춰서 벨베데레에서 하루종일 클림트를 볼 거야. 일찍 끝난다면 시내로 나와서 구경을 한 바퀴. 내일은 날이 좀 맑았으면 좋겠는데. 대신 일찍 자야지. 모레도 일찍 일어나서, 여덟 시 반 오픈 근처에 쇤브룬 궁을 갔다가, 점심시간쯤 미술사 박물관.
그 다음 날도 일찍 일어나야 해. 아침 여덟 시 버스를 타려면 숙소에서 여섯 시 반에는 체크아웃을 해야하니까!
옆 테이블 할아버지와 즐거운 대화를 했던 기억이 있다. 피포가 왜 Queen인지 한참을 설명하고, 박물관들과- 교수였댔던 것 같은데,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네.